매거진 천인 책방

당신을 바라봅니다

있는 그대로 나를 바라보자

by 리안천인

희상스님의 선화집(禪畵集) 당신을 바라봅니다, '2012.8, 담앤북스를 읽었다. 책을 읽는 동안은 내내 힐링의 시간이었다. "바쁜 일상에 그림 한 점 바라보고 한 호흡 쉬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라는 저자의 말씀처럼 책을 펼치면 마치 명상을 하는 듯 마음이 고요해진다. 그림이 편안하게 느껴져서 좋은데,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울림을 주는 글이 함께 있어 더 좋다. 한 편의 시와 같고 동시처럼 쉬운 문체가 대부분이지만, 불교의 선어(禪語)처럼 깊은 함의(含意)가 있는 문구도 많아 에이아이에게 물어보기도 하면서 읽었다.


1장에서부터 묵직한 화두를 만난다. 나는 누구일까요?

"하얀 빈 종이에 연필로 선을 긋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위에서 옆으로…/ 눈을 그리고 나니/ 그림 속의 얼굴이 나를 보고 웃고 있네요/ 입을 그리고 나니/ 나를 보고 미소를 짓습니다/ 그림 속의 얼굴이/ 환하게 웃을수록/ 나의 마음도 환해집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그림 속의 얼굴이 웃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다는 뜻일까? 눈은 대체 무엇일까? '눈의 능력이 보는 역할뿐만 아니라 나를 비추는 거울'임을 느낀다. “나는 누구일까요” 그림도 나고, 웃음도 나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도 모두 내가 아닐까. "나는 누구일까요?"라는 질문은 결국, ‘과거심도 현재심도 미래심도 얻을 수 없는, 나의 이 마음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아닌가 한다.


"옆 사람을 위해 빈자리를 내어 주십시오/큰 비움은 가득한 충만으로 돌아옵니다."

스님은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문구를 툭툭 던져주신다. '비움'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집착·욕망·두려움 같은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비워낸 자리에 새로운 충만과 고요함·지혜·자유·자비가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온다는 뜻이리라. 저자 희상스님은 비움은 ‘없어짐’이 아니라 ‘돌아옴’, ‘채워짐’이라는 역설적 진리를 설명하사는 것이리라.


"나를 봅니다/ 나를 듣습니다/ 그리고 나를 느낍니다"

나를 본다는 것은 외부의 시선이 아니라 내 마음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일이다. 나를 듣는다는 것은 세상의 소음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속삭임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나를 느낀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이 세 가지는 결국 하나의 방향, 바깥으로 흩어져 있던 의식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비움이 일어나고, 그 비움이 다시 충만으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조고각하(照顧脚下)입니다/ 오늘은 나의 마음을 잘 살펴야 하겠습니다."

'조고각하, 발밑을 살피라'”라는 이 짧은 가르침 안에는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정직하게 바라보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오늘 마음을 살핀다는 것은 마음이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일, 불필요한 걱정이나 습관적 반응을 잠시 멈추는 일, ‘이게 지금 나에게 필요한가’ 하고 조용히 묻는 일, 그리고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일이다. 조고각하의 태도로 하루를 시작하면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작은 일에도 중심을 잃지 않고, 내가 나를 돌보고 있다는 감각이 자연스럽게 생겨날 것이다.


"걷습니다. 걷습니다. 길 위를 걷습니다 (중략) 오늘도 자욱한 안개 숲을 지나 화련강가를 향하여 길 위를 걷습니다. 뚜벅뚜벅..."

스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길은 두려움의 길이 아니라 마음을 더 섬세하게 깨우는 길에 가까워짐을 느낀다. 자욱한 안개 숲을 걸으면 멀리 보이지 않으니 지금 딛는 한 걸음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이는 주변의 소음이 흐려지니 내 안의 소리가 더 또렷해지고, 길이 불확실하니 나를 믿는 마음이 조금 더 단단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뚜벅뚜벅 걷는 그 리듬 그 자체가 수행이고, 알아차림이고, 조고각하의 실천이리라. 안개가 걷히는 건 내가 컨트롤할 수 없지만, 안갯속에서 어떻게 걷는가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화련강가를 향한다는 것은 마음이 향하는 곳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라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은 흐릿한 길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걸어가는, 걸음이 곧 수행이라는 뜻이리라.


"눈을 감습니다/ 귀를 기울입니다/ 대상과 나는/ 즉심(即心)입니다/ 눈을 뜹니다/ 그리고/ 바라봅니다....."

눈을 감는 것은 바깥의 형상을 끊고, 마음의 결을 살피는 순간이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닫힘이 아니라 내면을 향해 문을 여는 일이다. 귀를 기울이는 것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 너머의 마음 움직임을 듣는 일, 외부의 대상과 나 사이의 경계가 조금씩 흐려지는 자리다. 대상과 너는 즉심, 대상(對象)과 나(我)가 둘이 아니라는 하나라는 깨달음이다. 마음이 곧 세계이고, 세계가 곧 마음이다. 그렇다면 눈을 뜨는 것은 단순히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 이후의 바라봄이다.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 속에서 드러나는 마음의 작용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 바라봄은 판단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인연을 받아들이는 고요한 관조이다.


"움직임을 봅니다. 나무도 움직이고 세상에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움직입니다. 모두들 자연스러운 움직입니다"

모든 생명은 움직인다.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고, 구름은 하늘에서 흘러가고, 강물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마음 또한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움직임을 반복한다. 스님은 이 모든 움직임은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인연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라고 설명한다. 움직임을 보는 순간 이미 수행이 아닐까. '움직임을 보되 붙잡지 않고, 변화를 느끼되 흔들리지 않는 마음' 그 자리가 바로 희상스님이 말하는 '즉심(卽心)'이 아닐까 한다.


"절집 지붕에/ 하얀 눈이 내립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성인들이 들어오시게 문을/ 활짝 열어 두세요."

마치 한 편의 동시 같고, 수묵화 같다. 군 복무 시절의 추억이 떠 오른다. 추운 겨울 아무도 없어 고요한 하얀 눈밭 위를 예쁜 노루만 바삐 달려가던, 군사분계선 안 백마고지의 새벽 공기처럼 맑고 깊다. 절집 지붕 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는 하얀 눈은 세상의 분주함을 모두 멈추게 한다. 그 고요 속에서 문을 활짝 열어두라는 말씀은, 단순한 환대가 아니라 ' 마음의 문을 여는 수행'이리라.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스님의 글에 크리스마스 캐럴 같은 표현이 나오니 감탄 그 자체요, 성스러운 느낌이 든다. 성인들이 들어오시게 활짝 열어 두면, 내 마음속에 지혜, 자비, 고요와 깨달음이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고요하고 거룩한 밤의 한가운데에 조용히 앉아 있는 듯하다.


"저 너머에 무엇이 보이십니까?/ 목을 길게 빼고 멀리멀리 바라봅니다/ 저 너머에 무엇이 보이세요?"

감탄을 넘어 기가 막힐 지경이다. 저 멀리 마음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자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희상스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저 너머에 새로운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아직 보지 못한 나의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아닐까? 저 너머를 본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다시 보는 일이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다음 생에 계속된답니다/ 걱정 마십시오/ 때문에/ 다시 여기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삶이 끊어지지 않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는 말씀이니 안심이 된다. 그렇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삶이 한 번으로 끝나는 단절이 아니라 이어지고, 흘러가고, 다시 피어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의 삶은 우연이 아니라 이어져 온 인연의 결과이기 때문에 ‘다시 여기’에 있기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보면 지금의 나는 이전의 모든 생이 모여 만들어낸 인연이고, 앞으로의 생 또한 지금의 나로부터 이어진다. 그러니 이 순간을 헛되이 해서도 안되고,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마음은/ 마음은/ 쓰면 쓸수록 커진 답니다./ 마음은/ 마음은/ 내면 낼수록/ 좋아진답니다/ 드러내는 마음/ 무심한 마음.../ 잘 살펴야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마치 사구게처럼 고요하다. 마음은 나누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나눌수록 넓어지고, 베풀수록 깊어지고, 드러낼수록 밝아지는 것이다. 물처럼 흐를 때 맑아지고, 등불처럼 나눌 때 더 환해진다. 마음을 쓰는 것도, 내는 것도, 드러내는 것도, 비우는 것도 결국은 살피는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길이 된다. '세상의 모든 현상(유위법)이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처럼 무상하므로,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는 금강경의 문구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 떠오른다.


책을 덮으니 마음이 더 단단해짐을 느낀다. 추천사에서 서울대 미학과 명법 강사님이 스님의 그림을 “세간 사람들 보기 좋으라고 그린 그저 그런 예쁜 그림이 아니라, 수줍은 침묵 속에 인고의 세월을 품은 그림”이라고 평하신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저자 희상스님

아침에 일어나 호미를 들고 들로 나가는 농부처럼 긴 세월 무심한 자세로 부처님의 사상을 예술작품을 빌려 표현하고 있는 스님은 경북 청도 운문사 운문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미술학과에서 한국화를 전공하였으며 해인사 선원 및 제방선원에서 수행하였다. 늘 다양한 작업을 통해 본질에 가까이 접근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던 중 “바르게 바라봄”의 화두를 안고 독일로 건너가 브레멘국립조형예술대학교에서 현대미술을 전공하였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예술에 더 가까이 접근시킬 수 있겠는가를 고민하는 스님은 현재 부산 해운대 유연선원 주지 소임을 맡고 있으며 선화와 수행을 접목한 포교를 위해 정진하고 있다.(프로필 출처: 교보문고)


나는 누구일까요?(그림 출처: 법보신문)
마음. 마음은/ 마음은/ 쓰면 쓸수록 커진 답니다.(그림 출처: 현대불교)
희상스님은 고무신을 활용해 수행자의 검약과 구도(求道)의 과정을 표현하는 설치미술 작가이기도 하다. 스님들의 고무신은 수행의 흔적이고, 깨달음을 향한 움직임이 그대로 기록된 사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바쁜 사람도 바로 읽도록 하는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