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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슬로우 Jul 18. 2020

[부록]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북홀릭

매일 스타트업과 브런치. 110 day


지젝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라고 해서 기대를 잔뜩하고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읽기 시작했다. 읽을수록 늪에 빠지는 것 같고 괴이한 기분이 들어 책을 놓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빨려 들어가 단숨에 3권을 읽어 치웠다. 무엇이 거짓말일지 그 반전을 궁금해하면서.. 어쩌면 아가사 크리스티의 탐정소설 같은 전개를 기대했었나 보다. 범인이 잡히고 사건이 모두 해결되기를. 하지만 이 책은 끝을 보고 나도 아직 말끔하지 못하고 미해결 된 기분이다. 엄청난 철학적 사유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머리가 너무 아프다. 마치 지젝처럼.. 아.. '지젝은 골치 아파.. 하지만 너무 매력적이야'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이 딱 그렇다.


출처: https://youtu.be/089zgLTrQGE



recipe 176.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지젝은 라깡을 빌어 우리에게 정상의 영역이란 없다고 말한다. 인간에게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불분명하며 정상의 범주에 들더라도 그것은 '정신병'에 걸리지 않기 위한 방어로, 경미하게나마 ‘신경증' 환자로 살거나 또는 ‘성도착'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책에 나오는 많은 등장인물들은 모두 이 세가지 부류 어딘가에 해당한다. 정신병 증세인 자 아니면 신경증을 앓는 자 아니면 성도착증에 빠진 자. 소설 속 이해하기 어려운 많은 등장인물들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우리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어떤 모습들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는 것이다.


존재라면 누구나 온전하지 않고 결핍과 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마치 그렇지 않은 듯 자기가 가진 틈을 매우려고 우리는 부단히도 노력하며 산다. 그런 존재들이 모인 공동체 사회도 역시 결핍의 총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회에서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개인의 삶도 전쟁터가 되어간다. 이 책은 어쩌면 우리의 삶이 곧 잔혹한 전쟁터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3권으로 이루어진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옛 버전


이 책은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헝가리 시골 마을에서 살아남은 쌍둥이 소년들의 이야기가 각기 다르게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에서는 루카스와 클라우스 형제가 마치 한 몸처럼 '우리'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그려지고, 2권에는 전쟁 통에 국경선에서 클라우스와 헤어지고 마을에 남은 '루카스'의 삶이 그려지고, 3권에서는 드디어 국경을 넘어 루카스를 찾아 마을로 돌아온 나이 든 '클라우스'(사실은 루카스)와 루카스(사실은 '클라우스')가 만나게 되는데, 그동안 미처 말하지 못한 비밀로 인해 둘은 자살을 암시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는 사실 철자 순서만 바꾸면 같은 이름이다. 이 둘은 마치 한 사람의 분열된 자아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정신분석학적으로, 이 책은 한 존재가 '주체'로 태어나기 위한 과정으로, 자기부정의 부정이 결국 긍정으로 무화되어 나아가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주체'로서의 창조적인 삶 즉, 글을 쓰는 것으로 주체성을 회복하는 작가 스스로의 소설 작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권에서 루카스와 클라우스라는 '존재'는 쌍둥이 형제로 나오지만, 2권에서는 국경선을 두고 헤어진 클라우스는 사실 루카스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는 암시를 하며 1권에서의 '존재'를 한 번 부정한다. 그러다 3권에 가서는 그 예상을 뒤엎고 진짜 클라우스가 실존하는 것으로 등장하면서 2권에서의 '존재'의 인식을 또 한번 뒤집는 부정을 한다. 부정의 부정 논리는 지젝의 변증법으로 보면 대립의 일치로, 대립이 사라지고, 대립이 무화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1권에서 어려서 '우리'라는 합일이었던 존재는 자라면서 사회화를 거쳐 서서히 분열을 겪는다. 그렇게 분열된 '내'(루카스) 안의 '타자'(클라우스)를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가 2,3권이라면, 서로의 존재가 결핍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결국 마지막에는 내 안의 타자를 죽이는 과정 즉, 자살을 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봉합하면서 다시 내면의 ‘우리'로 통합되어 처음 1권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어쩌면 자아의 주체성 회복에 대한 염원이 담긴 작가의 빅픽처일지도 모르겠다  



이 다이어그램은 내가 이 책을 읽는 관점이다. ‘루카스' 역시 온전하지 못한 존재이고, '클라우스' 역시 온전하지 못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그 둘이 합치된 '루카스 클라우스'(할아버지 이름: 루카스와 클라우스는 사실 엄마가 자신의 아버지,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둘에게 이름을 붙여줬다)라는 '우리'로 통합되는 존재도 역시 이 둘 모두의 일부일 뿐, 한 자아의 내부의 A,B,C 그 어느 존재도 완전히 온전할 수가 없는 존재들이다. 그저 함께해야만 서로가 서로를 온전케 해주는 결핍된 존재들일뿐. 사회는 이런 존재들의 교집합이 서로 또 교집합 된 거대한 결핍공동체이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보살핀다면 조금씩 온전한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도 루카스는 누군가와 무언가를 보살피는 행위를 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2권에서 보면 루카스는 자신도 형제를 잃은 반쪽짜리 존재이면서도 마티아스와 야스민(야스민은 결국 살해하지만..) 클라라와 신부, 페테르와 빅토르 등 자기 마을 사람들을 무던히 보살피는 삶을 사는 것으로 나온다. 루카스는 국경을 넘을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마을을 떠나지 않고 돌아와, 할머니집의 채소밭을 가꾸고 하모니카를 불고 문구점에서 노트와 연필을 사서 노트에 글을 적고 장작 파는 일을 하면서 무던히 자신의 터전을 닦고 살아가는 존재로 나오는데, 이것이 우리 인간이 하고 사는, 아니 해야만 하는.. 개인적(실존적) 그리고 동시에 공동체적(역사적)인 존재로서의 윤리적인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체적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내 뜻과는 상관없이 무자비한 전쟁이 터졌어도, 결국은 함께 살아내야 하는 개인으로서 행해야 할 인간적 윤리를.. 말이다.


이 소설은 윤리와 도덕을 분리하고 있는데, 현실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도덕적인 덕목을 소설 속에서는 모두 위반하기 때문에 읽는 독자를 통쾌하게 만들기도 한다. 작가는 엄격한 현실적 도덕률을 깨부수며 소설에서는 루카스와 그 외의 등장인물들이 벌이는 살인과 각종 기괴한 범죄를 판타지적으로 그려내고, 감추어진 인간의 괴이한 동물적 변태적 본성들을 미스테리하게 풀어낸다. 결국, 작가의 현실을 재구성하는 창조적 능력이 아주 돋보이는 이 소설은 사실 메타 소설이다.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한 소설로 보이는 이 책은, 사실 작가가 루카스와 클라우스의 스토리를 써 내려감으로써 우리 인간 존재의 결핍을 탐구하고, 결국은 작가로서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주체적인 존재로서의 삶을 회복하고 나아가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 전체를 담고 있는 작가의 행위로써의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 스스로 세 번이나 다른 각도의 새로운 글을 써 내려가면서 무수하게도 일상을, 스토리라인을, 캐릭터를, 구도를.. 깨부수고 낯설게 보기 위한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이다. 즉, 이 책에는 작가가 글을 쓰는 창작의 과정들을 통해 존재로서의 결핍을 승화하는 과정이 담겨있다. 그래서 이 책 3권이 어딘지 텅 빈 듯 문제해결이 되지 않는 듯한 불완전함을 가지고 있는 듯하면서도, 각각 1권씩 따로 띄어놓고 보아도 충분히 홀로 존재하기도 하고, 서로가 유기적으로 따로 또 같이 얽혀야만 완성이 되는 듯하기도 하면서, 너무나도 촘촘하게 하지만 얽기 설기 서로의 스토리적 결핍을 봉합하는 방식으로 통합되면서 얽혀있다.



작가는 어쩌면 이 책을 쓰는 행위를 통해 이 병리적인 세계에 그저 내던져진 채, 주어진 대로 고분 하게 사회적 존재로서 순응하며 '적응'을 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만의 다른 삶의 방식을 '창조'하는 것을 택한 것이다. 소설 속 자신만의 창조적 세계를 구축하여 이 세계보다도 더 병리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를 재창조해내었으니까.. 현실을 뛰어넘는 판타지 세계로 이행함으로써, 작가는 자신만의 생의 가치와 이유를 조금씩 찾았을 것이다. 독자(나)도 함께 작가의 행위적 글을 따라가면서 마음속으로 결심을 하게 된다. 나도 나만의 "한 권의 책을 써보아야겠다"는 결심을.   


난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나.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 지나갈 뿐이네.


어쩌면, 우리가 사는 '현실'은 곧 '판타지'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창조해 낸 저마다의 판타지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결핍으로 가득 찬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결코 제대로 살아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실보다는, 현실을 지탱케 해주는 그 무엇이 삶에서는 중요한데, 그런 현실을 방어해주는 것이 판타지일지도.. '욕망은 사랑에 대한 방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사랑이 끔찍하기 때문. 그렇기에 우리는 무아가 되는 온전한 합일의 사랑에 빠지기를 한없이 연기하면서 끊임없이 그저 타자로서 욕망하는 방식으로.. 그저 상대를 욕망하면서 마치 사랑하는 척 거짓말하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온전한 사랑을 하게 되면 내가 소멸되기 때문에 존재는 사랑을 견딜 수가 없다. 온전히 상대방에게 흡수되는 사랑은 어쩌면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살기 위해 택하는 방식이 욕망이듯, 우리는 현실을 판타지로 채우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안은 있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회사가 만들어 높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국가가, 체계가 만들어 놓은 판타지의 세계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방식으로 주체적인 '판타지'를 구축한다면, 그때부터는 '현실'도 살만한 세상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 나도 한 권의 책을 쓰듯 내 삶을 스스로 써 내려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없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내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묘사하고 있는 세계에 머무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자기 자신의 눈이 아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실재를 보게 된다." - 생각의 탄생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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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사람들이 진실을 깨닫게 만드는 거짓말이다" -피카소


출처: https://youtu.be/xIK9z8lIH4M


결국,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아고타 크리스토프 작가가 써 내려간 예술 작품 3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존재가 할 수 있는 세가지 거짓말은 어쩌면 '나는 나로서 온전하다' '너는 너로서 온전하다' '우리는 우리로서 온전하다'라는 착각과 오만이 아닐까? 그럼, '나는 나 그 자체로 결핍이고, 너도 너 그 자체로 결핍이고, 우리는 우리로서 결핍이다'가 진실일까?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끝없이 부정을 통해 새로 거듭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책의 이해를 돕는 방송

https://apple.co/3eRmO0n

https://apple.co/2Vzjdwz



목표일: 110/365 days

리서치: 176/524 recip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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