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다는 것의 예의

텃밭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 텃밭 이야기 (8)

by 완서담필


래디시의 붉은 빛이 점점 깊어간다. 아마 다음 주쯤이면 수확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엉뚱한 생각 하나가 불쑥 고개를 든다. 살아 있다는 건, 다른 생명의 모습을 잠시 빌려 사는 일이라는 것.


텃밭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 텃밭이지만, 그곳은 가끔 나를 ‘인간’이라는 시야 밖으로 데려다 놓는다. 아마 텃밭에 갈 때마다 스며드는 그 안심감도, 바로 그런 자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먹으며 산다. 생명의 질서가 본래 그렇게 짜여 있기 때문이다. 자각하지 못하면 아무 일도 없지만, 한 번 깨닫는 순간 묘한 죄의식이 따라온다. 그러나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그 모순의 경계 위에서, 우리는 매일 식탁 앞에 앉는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것은 아니지만, 몇 편의 서평만으로도 그 안의 공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살을 먹는 일, 피를 나누는 일, 그리고 마침내 식물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오래된 충동. 먹는다는 행위를 부끄러워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존재의 깊은 역설이 그 안에 서려 있었다.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을 보던 어느 밤, 비슷한 감정이 스쳤다. 거인이 인간을 삼키는 장면 속에서 문득, 우리가 지금까지 삼켜 온 것들을 떠올렸다. 동물과 숲, 바다, 그리고 스스로의 미래까지. 생명이 생명을 삼키며 이어지는 그 냉혹한 순환이,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이상할 만큼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결국, 다른 생명을 취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다. 그 사실을 아는 일은 언제나 약간의 고통을 동반하지만,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


며칠 전, 문득 고기가 먹고 싶어졌다. 죄의식도 변명도 없이 프라이팬을 달궈 고기를 굽고, 한입 베어 물었다. 단순하게, 맛있었다. 이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먹는다는 일에도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이 그래서 좋다. 먹어야만 사는 존재의 원죄 속에서도, 먹는 기쁨을 느낄 때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 미안함의 언어. 그것은 식재를 기르고 음식을 만든 이에게 건네는 인사이자, 동시에 내게 먹히는 비인간적 존재들에 대한 속삭임이기도 하다. 비록 위선일지라도, 그 말 속에는 내가 지키고 싶은 최소한의 예의가 깃들어 있다.


나 또한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흙이 또다른 생명의 뿌리를 키워낼 것이다. 그것을 속죄라 부르든, 순환이라 부르든 상관없다.


이런 망상 같은 생각을 하다 보면, 문득 식물이야말로 가장 고등하고 품격 높은 생명체라는 생각에 닿는다. 그들은 태양과 바람, 물, 그리고 이미 흙으로 돌아간 것들의 자양분만으로 자라나 또다른 생명으로 이어진다. 아무것도 빼앗지 않으면서도, 끝내 생명을 이어가는 존재들.


래디시는 오늘도 조금 더 붉게 익어 간다. 먹는다는 것의 예의와 원죄를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적고 있는 나지만, 아마 다음 주쯤이면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어쩌면 들뜬 마음으로 그 래디시를 수확하고 있을 것이다.


붉은 래디시의 몸통과 푸른 이파리는 머지않아 물김치나 샐러드의 일부가 되겠지. 내 몸의 오래된 체계가 그 신호를 알아채면, 침샘이 반응하고 식욕이 깨어날 것이다. 그런 본능 위에 원죄나 속죄 같은 생각을 덧씌우는 일은 어쩌면 조금 가증스럽다. 그럼에도, 그런 모순과 망설임까지 포함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의 정직한 리듬 아닐까.


지금은 가을. 수확의 계절. 언젠가 나도 수확되어, 가장 고등하고 품격 높은 생명체들의 뿌리 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가 오면 나는 기꺼이 돌아가리라. 오늘 이렇게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그 순환의 한가운데에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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