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텃밭, 계절을 건너는 법

텃밭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 텃밭 이야기 (13)

by 완서담필


가끔 계절의 경계에 서면 문득 오래된 노래가 떠오른다. 며칠 전 우연히 틀어놓은 방송에서 “Donde Voy”가 흘러나왔다.


“새벽 여명은 달리고 있는 나를 내려다봅니다. 이제 막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 태양이여, 제발 내 모습을 비추지 마소서”


멕시코 출신 불법 이민자의 애잔한 삶을 노래한 곡이다. 떠돌이의 고단한 발걸음, 법과 삶 사이에서 갈라지는 삶의 통증이 기타 선율 사이로 깊게 배어 있었다.


불법 체류자는 아니지만, 나 또한 이 땅에서는 여전히 이방인이다. 오래 살아도 완전히 스며들지 않는 공기라는 것이 있고, 아무리 익숙해져도 문득 허전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노래의 멜로디가 유독 내 마음에 사무치는 이유도 어쩌면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 큰 위로가 되는 곳이 바로 이 텃밭이다. 작고 조촐한 땅이지만, 이방인의 마음을 잠시나마 고향으로 되돌려주는 조용한 안식처다. 흙을 만지고 모종을 심으며 계절을 따라 몸을 움직이다 보면,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같은 거창한 질문도 잠시 흙 속에 묻어두게 된다. 무엇보다 흙에서 길러낸 채소들은, 비록 열도의 토양에서 자란 것들이지만 모국의 작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그 채소들로 차려낸 음식은 어쩔 수 없이 고향의 손맛을 내고, 그 맛은 제철의 바람과 함께 내 안의 오래된 기억들을 하나둘 깨운다.


인생의 계절도 이제 겨울의 문턱쯤일까, 아니면 아직 늦가을의 끝자락일까. 이곳에 정든 구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뿌리 내렸다고 말할 수도 없는 모호한 시간. 어쩌면 인생은 늘 조금은 낯선 풍경 속을 걸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젊은 날 좋아했던 노래 한 곡이 불쑥 들려오면, 그때의 내가 무심히 지금의 내게 손을 흔드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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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농사라 부르기엔 소박한 나의 텃밭 일구기는 무 수확을 끝으로 조용히 막을 내렸다. 잘 영근 무를 하나 뽑아 흙을 털어내는 그 묵직한 손맛은, 올해도 이렇게 한 계절을 무사히 건넜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단단한 무의 몸통은 무생채가 되어 상에 오르고, 무청은 겨울을 날 시래기가 되었다. 몇 뿌리 남겨둔 무는 며칠 뒤 나박김치로 변해, 냉장고 한 켠에서 쨍한 제철의 맛을 전해 줄 것이다.


텃밭은 이렇게 또 한 해를 마무리한다. 나름대로의 풍성함과 아쉬움이 교차했지만, 그래도 흙은 묵묵히 제 역할을 다했다. 그 사실이 알 수 없는 안도감을 준다. 내년 봄에는 다시 감자를 심을 것이다. 토마토와 오이도 한두 포기씩 심어 볼 요량이다. 가을에는 시금치 씨앗을 넉넉히 뿌려보려 한다. 흙 속에서는 벌써 또 다른 준비가 시작되고 있을 것이다. 내년의 초록을 기다리는 마음 또한 그 흙만큼 깊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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