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재미 말고 다른 것도 있었으면 해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글이나 사진이 아니라 그림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워낙 손재주가 없는 사람이라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지만, 기회가 생겼다.
그것도 무려 개인 레슨.
회화 작업을 하는 대학 선배를 통해 드로잉을 배우기 시작했다.
원근감 제로에 관찰력 제로에 진득하게 앉아 공을 들이는 일도 못하는 성격이란 걸 처음 알았다.
거칠고, 제멋대로 그리고 대충.
조금만 더 세심하게 보면 한결 나아질 텐데, 조금만 더 해 봐...라는 말을 매번 들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해 보면 신기하게도 그림이 확, 나아졌다.
조금만 더, 의 마법이었다.
선긋기부터 명암과 원근감 등을 살릴 수 있는 드로잉을 차례로 배우면서 자유 드로잉을 시작했다.
커버 사진은 동네 카페에 앉아서 바라본 길 건너의 풍경을 담은 드로잉이다.
오래돼 곧 사라질 건물이었는데,
그날따라 오른쪽 귀퉁이로 환한 햇살이 들면서 뭉개지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저 자리에 훨씬 높고 화려한 건물이 들어섰다.
이런 식으로 순간의 느낌을 사진처럼 찰칵, 단번에 찍는 게 아니라
오래오래 그 느낌을 기억하면서 작업하는 게 좋았다.
그림 수업은 연필 드로잉에서 수채화로 이어졌다.
모든 일이 그렇고 사는 일이 그렇듯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는다. 그림 역시.
눈으로 보는 색과 그 색을 종이 위에 얹었을 때
그리고 시간에 따라서도 오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수채화의 매력인 것 같다.
그렇게 그림 수업은 재밌었지만
잘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면서 스트레스가 됐다.
해결책은 휴식이다.
뭔가를 작정하고 뭔가가 돼보려고 하는 순간
재미는 사라진다. 그간의 나를 돌아보면 그랬다.
그래서 언제나 조금 떨어져서 조금 얕게, 프로보다 아마추어로 있고 싶었다.
대충이면 어떤가, 헐렁하면 어떤가, 좀 얕고 어설프면 어떤가.
즐겁자고 시작한 일이니까 재밌으면 그만이다.
라고 하지만 조금 더 마음을 들여다보면
잘 하지 못해서 실망하게 될까봐, 혹시라도 마음을 다치게 될까봐
나는 스스로에게 그동안 최면을 걸어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요즘은 든다.
언제나 전부를 다 걸지는 않는 사람, 모두를 다 내놓지는 않는 사람,
사랑하면서도 '지금은 사랑해'라고 조건을 붙여 말하는 사람,
언제라도 도망갈 준비를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런 사람인 걸 알아버렸으니 이제 어떡해야 하지?
재밌으면 그만이지, 에서 한 걸음을 더 떼야하는 건가.
지금은 사랑해, 가 아니라 너무너무 사랑해라고 말해야 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