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 눌 때 아이폰을 봅니다
나는 세 아이의 이모, 두 아이의 고모다.
다섯 아이 모두에게 고른 사랑을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엄마도 자식 모두에게 고른 사랑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 (또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러니 하물며 조카아이들이야..
똥 눌 때 신문을 보던 이 아이는 내가 대놓고 예뻐하는 조카다.
이제 열여섯 살이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내내 한집에 살기도 했지만
먹이고, 재우고, 똥 기저귀 갈고, 씻기고, 가르치고, 잔소리하고...
그렇게 내가 반은 키웠다고 자신한다.
한글은 뗐고, 아직 지가 눈 똥은 닦기 어려워한 나이 때쯤이었을 게다.
어린이집은 졸업하고 유치원에 다닐 무렵,
어디선가 이런 신문을 받아와서는 변기에 척 앉아 읽는 게
너무 웃기고 귀여워서 나는 그 앞에 척 앉아 똥 누는 아이를 찍었다.
그때는 만두 먹다 가서 똥 누이고 다시 와서 만두 먹던, 그렇게 비위 좋은 시절이었지.
신문 보던 아이는 이제 자라서 아이폰을 본다.
이 사진을 보여줬더니 '헐' 이후 별말이 없다. '나 아닌데?' 이런 반응이랄까.
내 키와 몸무게를 훌쩍 넘어섰고,
가끔 아니 자주 우주의 말을 하곤 해서 지 엄마를 기함케 만들기도 하는,
흔하고 무서운 중2 청소년으로 자랐다.
어버이 날, 어린이 날 다 있는데 왜 이모의 날은 없냐며, 이모의 날을 만들어 주기도 했던
내가 길 하나 건너에 있는 집으로 분가(?)하던 날, 펑펑 울던
그 예쁜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싶지만...
그게 세월이니까.
내 기억엔 없지만 나도 이모 손에 자랐던 때가 있었다고 들었다.
연년생인 동생이 생기면서 외가에 몇 달간 보내졌고, 당시 결혼도 안 한 둘째 이모가 날 돌봤다고 했다.
이제 그만 집에 데려가려고 엄마가 날 찾아 왔을 땐,
우리 엄마가 아니라며 그렇게 울며불며 안 간다고 떼를 써서 엄마 속을 후벼 팠다고, 엄마가 말했다.
그 이야길 들으며 나는 엄마의 속상함보다 그 어린애가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으면,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 그 둘째 이모는 이제 딸, 아들을 짝지어 내보냈고 가끔 딸아이의 딸을 봐준다고 했다.
그때 이모가 돌보던 조카는 자라다 못해 이제 늙어가고 있다.
가끔 가족행사에서 둘째 이모를 만날 때 뭔가 남다름이 느껴졌던 건
내 기억에는 없지만 그 어린 날들의 시간 때문이 아닐까.
나를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품고했던 그 시간들.
똥 눌 때 신문 보던 이 아이도 다 자라서 나처럼 '난 기억 안 나.' 그렇게 쌩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슬퍼하거나 서운해하진 말아야지.
내가 그런 것처럼, 뭔지는 모르지만 심장에 새겨진 남다른 뭔가가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시간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