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선물을 가장한 사색

#9. 프랑크푸르트 & 하이델베르크 2014

by 스토리텔러

아무리 기억을 쥐어짜 내도 왜 프랑크푸르트를 여행지로 삼았는지 상기해낼 수 없었다. 가고 싶은 맛집이 있던 곳도 아니었고, 딱히 엄청나게 유명한 관광 포인트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겨우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있었던 것이겠지만, 그 시간이 헛되이 느껴지진 않는다. 아마 직전 여행지를 너무 안 좋게 마무리해서 더 그런 것도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도심 속을 상쾌하게 산책하는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이런 부류의 기억을 간직하는 도시는 프랑크푸르트를 포함하여 스트라스부르, 멜버른, 시드니 정도였다. 모든 여행지가 항상 특색 있고 이국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주게 한 도시랄까?




프랑크푸르트의 늦은 오후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뒤, 관광 지도를 찾아보면서 유일하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곳은 괴테 생가였다. 괴테가 쓴 파우스트라는 책을 워낙 재밌게 읽었고, 애초에 글을 쓰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나에게 괴테라는 사람은 아득히 높은 곳에 있는 선배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 사람이 자라난 곳에 가서 영감을 받고 글 쓰는 '기운'을 받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괴테 생가는 내가 있는 숙소에서 마인강을 건너가면 있는 곳에 위치해있었다. 도심을 걷다 보니 확 트인 마인강이 등장했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햇살에 비친 마인강과 그 주변에 있는 공원들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바라만 보고 있으면, 나 자신도 행복해지는 마법이 일어난다.


유리벽에 비친 햇살이 공원을 비춘다


조금은 길을 돌아가지만 공원 근처를 정처 없이 걸었다. 아침을 안 먹고 나와서 그런지 살짝 허기가 들었고, 이럴 때 샌드위치랑 작은 주스 한 병을 들고 나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후회를 했다. 벤치에 앉아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새삼 부러워졌다. 그 자리에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허기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아직 참을만했지만, 괴테 생가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필시 걷다 보면 점점 배가 고파질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명한 맛집들을 검색해놓은 것도 아니었다. 결국 강가를 거닐다가 눈에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딱히 그곳에 들어간 이유는 없었다. 배가 너무 고팠고, 근처에 식당이 그곳밖에 없었다. 지금 다시 구글맵을 켜서 검색해봐도 도무지 어디에 있는 식당인지 감도 안 잡히는 곳이다.


파스타와 와인 한 잔


당시 조금 편리하다 느꼈던 건 와인을 파는 방식이었다. 내가 몰랐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유럽에서는 와인을 한 잔 단위로도 판매했었다. 그러기에 술을 별로 안 좋아하거나, 혼자 식당을 방문할 때 와인 한 병을 시키기 부담스러운 사람들도 쉽사리 와인을 음미할 수 있었다. 베를린에서 겪었던 낮술의 공포가 아직 남아있었지만, 이 운치를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용기를 내어 와인 한 잔과 파스타를 주문했다.


강가를 바라보며 먹는 파스타와 와인 한 잔, 그리고 담백한 바게트 빵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낮에 마시는 와인 때문에 베를린처럼 몸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지는 이변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모금 한 모금을 신중하게 마시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오히려 몸이 따뜻해지고 적당히 기분 좋은 상태가 됐다. 그렇게 다시 길을 떠났고 반시간 정도를 걸어 괴테 생가에 도착했다.


사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집만 돌아다닌다면 시간이 금방 흘렀겠지만,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에 오디오 가이드를 구매했다. 덕분에 집 곳곳을 돌아다니며 어떤 장소에 어떤 사연이 얽혀있는지를 세세하게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소년이 그 집에서 성장하며 벌어진 이야기다. 하지만 괴테 같은 위대한 사람이라 그런지, 그 사건 하나하나가 왠지 모르게 대단해 보이고, 의미가 있게 다가왔다.


괴테의 생가에 보존되어 있는 그의 흔적들


집을 다 돌아보니 벌써 한 시간이 훌쩍 넘게 지나있었다. 사실 이때부터 막연해졌다. 다음 목적지가 묘연했던 것이다. 다행히 근처에 슈타델 미술관이라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국내에서 교과서로만 보던 유럽 명화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그곳에 들르기로 했다. 솔직히 아직까지도 여행 가서 미술과 관련된 전시에 가는 것에 그렇게 큰 매력을 느끼고 있지는 않다. 미술품들을 감상하는 것은 당연히 좋아하지만, 여행에서 보기에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 왜냐하면 해외에서 보는 것과 국내 전시회에서 보는 것에서 오는 차이점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슈타델 미술관을 나온 뒤로는 그냥 도시를 정처 없이 걸었다. 마치 첫날 이스탄불에서 정처 없이 골목길을 걸었던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다만 차이점은 프랑크푸르트는 거리가 훨씬 깨끗하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줬다는 것이다. 그 어떤 거리도 위험해 보이지 않았고 나에게 무슨 나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일말의 상상도 들지 않았다. 확실히 살기 좋은 도시라는 인상을 줬다.


슬슬 날이 어두워지는 프랑크푸르트의 거리


정처 없이 길을 걷다가 우연히 유로 타워를 만났다. 유럽 중앙은행이 있는 건물을 만나자 괜스레 기분이 묘해졌다. 전공이 경영인지라 금융권 쪽에 막연하게 관심이 있는 편이었고, 한 거대한 문화권의 중심을 맡는 은행 건물을 보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딱히 금융권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랑 같은 전공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 중 몇몇 우수한 사람들이 도착했을 종착점이라 생각하니 '나도 언젠가는 이런 곳에 와있을까?'라는 망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도시를 걷다 보니 어느새 밤이 다가왔다. 서울처럼 화려한 야경이 도시를 뒤덮지는 않았지만, 은은한 빛들이 도시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천천히 마인강 근처를 걷기 시작했다. 한강의 휘황찬란함이 없어도 그저 밤에 강가를 걷는다는 것이 감성을 젖어들게 만들었다.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 일이지만, 서울보다 이스탄불과 산토리니가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마인 강


미련이 남지 않는 것들보다 미련 투성이인 것들이 더 그리운 법이다. 20년 가까이 살아온 한국보다 고작 일주일 조금 넘게 있었던 두 도시에 무슨 미련이 그렇게 많았던 걸까. 오후에 마신 와인의 취기가 지금 올라온 것인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갑자기 re:plus의 Quietblue라는 곡이 듣고 싶어 지는 밤이었다. 이어폰을 주섬주섬 꺼내 인터넷이 안 되는 스마트폰에 저장된 곡을 들으며, 강에 반사되어 아른거리는 불빛들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제야 문득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붉은 지붕 하이델베르크


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 관련 책에서 인상 깊었던 장소 중 하나는 '철학자의 길'이라는 곳이었다. 한참 소설 쓰기에 심취해 있던 시절이라 그런지 철학에 관심이 많던 시기였고, 교과서에서만 보던 철학자들이 실제로 그 길을 걸으면서 유명한 철학적 이론들을 떠올렸을 거라 생각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곳이었다. 철학자의 길이 위치한 곳은 하이델베르크란 곳으로, 내 주요 여행지들과는 거리가 멀어서 아쉽게 고이 접어뒀던 도시였다. 하지만 이게 웬걸? 하이델베르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조금만 투자하면 바로 갈 수 있는 근교 도시였다. 이때의 나에게 있어서 이 사실은 최고의 생일 선물이었다. 망설임 없이 유레일 패스를 써서 하이델베르크로 향하는 기차를 예매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나는 하이델베르크 역에 내려서 그 거리를 거닐 수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미리 노트에 적어뒀던 버스 노선도를 보며 곧바로 철학자의 길 쪽으로 향했다. 사실 생각보다 시간이 여유롭지는 않았다.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빨리 지는 시기였고,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기 직전의 늦은 오후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하이델베르크는 철학자의 길 말고도 학생 감옥, 학생 식당 등 경험할 수 있는 장소가 많다. 그걸 몰랐던 나는 단지 철학자의 길 하나만을 바라보고 무작정 그쪽으로 향한 것이다.


낙엽 진 철학자의 길


말이 철학자의 길이지 이곳은 산이었다. 올라가기 위해서는 꽤 경사가 되는 산길을 올라가야 했고, 길 역시 매우 길어서 한 번 들어서면 되돌아가지 않는 이상 다른 출구로 빠져나오는데 꽤나 긴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다. 물론 이 사실들은 나중에 알게 된 것들이다. 그저 철학자의 길에 왔다는 생각에 들떠서 허겁지겁 메모장과 펜을 꺼내 들고 벤치를 찾아 헤맸다.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무턱대고 상념에 잠기기 시작했다.


철학자의 길에서 내려다보는 하이델베르크


사실 이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이때 끄적였던 메모장을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이미 6년이나 지난 일이라 어디 이름 모를 소각장에서 불탔을지, 재활용되어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담은 종이가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다만 기억나는 건 여기서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생각하며 그 생각의 흐름을 끄적였다는 것이었다. 별 거 없는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시대를 풍미했던 철학자들과 같은 공간에서 철학에 대해 생각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가치를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아마 이때 생각하는 것에 맛 들렸는지, 어느 여행지를 가든 한 자리를 정해서 그저 생각하고 그 흐름을 노트에 적는 게 습관이 된 것 같다. 파리, 런던, 니스, 쿠알라룸푸르, 시드니, 타이베이에서도 이 행동을 반복했던 것 같다. 이때 했던 생각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


늦은 오후의 하이델베르크


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가고 있을 때였다. 무심코 다리를 걷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참 예뻤다. 불타는 노을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도시에 깔리기 시작한 옅은 땅거미가 슬슬 일몰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직 이 도시를 떠나기에는 조금 아쉬운 감이 있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저 멀리 붉은 고성이 홀로 우뚝 서있는 것이 보였다. 내 사전 조사에는 없는 장소였지만, 독일의 오래된 고성이라는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생각보다 규모가 거대했던 고성


고성의 이름은 간단하게 하이델베르크 고성이었다. 아무 사전 지식도 없이 갔던 곳이라, 고성을 둘러봐도 어디가 어딘지 알 수는 없었다. 오디오 투어 가이드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 기차 시간에 맞추기 위해 고성을 오래 둘러보지는 못하는터라 그냥 구경만 했던 것 같다.


고성 안에는 감옥 비슷한 것들도 보였는데, 여기서 엽기적인 사진들 몇 개를 찍었던 것 말고는 딱히 인상적인 것이 없었다. 그래도 고성 꼭대기에서 바라본 하이델베르크의 붉은 지붕들은 여길 잘 올라왔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온통 붉은 지붕 투성이인 하이델베르크


산토리니에 이에 도시 자체가 하나의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 유럽의 오래된 도시였다. 통일감 때문인지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한국에서 이렇게 통일성 있게 구성된 장소를 찾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치 게임, 혹은 영화에서나 존재하는 가상의 마을에 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 이런 장소에서 벌어질 수 있는 환상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기차역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너무 먹음직스러운 간식을 보는 바람에 충동구매한 건 덤이었다.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프랑크푸르트에 가서 저녁 먹기에는 시간이 애매해서 이 간식으로 저녁을 대신하기로 했다. 이름도 모르는 당 덩어리를 기차에서 아그작거리며 땅거미가 어둑하게 진 독일의 시골길을 감상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건 '슈니발렌'이라는 음식이라고 한다.)




프랑크푸르트와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어딘가 역동적인 경험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여행의 중반부에 접어든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쉼터 같은 곳이었고, 이곳에서의 쉼 덕분에 후에 방문할 도시들을 더욱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유독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던 이곳. 사색하는 것 역시 여행을 즐기는 한 방법이라는 걸 알게 해 준 소중한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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