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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텔러 Nov 05. 2020

베르사이유의 장미

#4. 파리 2014 (3)

 어린 시절 즐겨 봤던 애니메이션 중 하나는 베르사이유의 장미라는 작품이었다. 본방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비디오테이프를 구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한 기억이 있다. 당시 오스칼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통해 베르사이유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접했던 것 같다. 그랬기에 파리 근교에 있는 베르사이유 궁전 방문은 내게 있어 당연한 수순이었다. 




베르사이유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파리에서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가는 방법은 매우 다양했다. 그중 내가 선택한 방법은 교외 전철 RER C선으로 가는 방법이었는데, 확실하게 조사하지 않고 가서 그런지 중간에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중간에 한 번 환승해야 하고 거기서 같은 호선이 세 갈래로 나뉘기 때문에 종착지를 잘 보고 내려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걸 잘 몰랐기에 엉뚱한 곳에 내렸고, 환승 지점까지 다시 돌아오고 가느라 거의 한 시간 넘는 시간을 소비해야만 했다.


 종착역에 내린 뒤에는 언제나 그랬듯, 사람들이 많이 걸어가는 쪽으로 따라갔다. 가로수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거리를 지나, 드디어 내 눈앞에 환하게 빛나는 금빛 건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멀리서 봐도 베르사이유 궁전인 걸 알 수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채, 전체적인 모습을 감상하고는 정문을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정문으로 가는 길에는 멋들어진 동상이 우뚝 솟아있었다. 태양왕 루이 14세. 절대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자였다.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몸부림치게 했던 그의 모습을 이제 와서 멋진 동상으로 바라보니 기분이 묘했다.


청명한 하늘 아래 우뚝 솟은 루이 14세


 궁전을 들어가는 곳은 정문처럼 생긴 곳이 아니라 정문 옆에 위치한 별관 같은 건물이었다. 인터넷에서 미리 표를 예매했기에 등록 번호를 제시하고 매우 간단하게 궁전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궁전 내부는 예상대로 호화로움의 극치였다. 나라에 얼마나 돈이 많으면 이 큰 궁전을 이렇게 고급진 물건들로 가득 채울 수 있을지 도무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궁금했던 점은 과연 각 방들의 용도가 명확했을지, 이곳에 상주하는 사람들은 각 방의 위치나 구조를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을지였다. 셀 수 없이 많은 방들이 각양각색의 특징을 갖고 있었기에 들었던 의문점이었다.


용도는 알 수 없지만 고급스러움으로 치장한 궁전의 방들


 방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웠던 건 역시나 거울의 방이었다. 이것도 한국에 돌아오고 베르사이유 궁전에 대해 알아보면서 알게 된 것이다. 아름다웠지만 크게 특징적인 것은 없던 다른 방들에 비해, 거울의 방은 들어서자마자 살짝 입이 벌어질 정도로 화려했다. 수많은 샹들리에가 방 안을 가득 비추고 있었다. 양쪽 벽면에 있는 유리로 된 거울들은 방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역시나 이곳에 궁전에 있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말 그대로 '거울의 방'


 방에 있는 거울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고, 천장에 그려진 유려한 벽화들도 감상한 뒤 다음 장소로 향했다. 이곳이 하이라이트였는지 궁전 내부를 관람하는 건 막바지에 이르렀다.




뜻밖의 만남


 궁전 내부를 다 둘러보고 뒤뜰로 나갔다. 말이 뒤뜰이었지 어지간한 공원보다 큰 정원이 떡하니 눈앞에 나타났다. 큰 호수를 중심으로 양쪽에 미궁과도 같은 덩굴 정원이 있었고, 호수 너머에는 거대한 공터, 더 나아가서는 강처럼 보이는 것이 지평선까지 늘어져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봐야 할지 감도 안 오는 넓이에 한동안 망연자실 서 있었다. 


드넓은 '뒤뜰'


 나는 종종 여행지의 공간을 게임의 공간이라고 생각하고는 한다. 당시에는 아직 게임 기획자가 아니었지만, 이미 게임 기획자가 되고픈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공간을 하나의 필드로 보고 접근한다. 이 장소를 어떻게 재구성할지, 어떤 이야기를 담을지 상상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내 여행이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이 공간을 게임의 필드로 상상했고, 보통 내가 게임을 할 때랑 동일한 방향으로 접근했다. 먼저 자칫하면 지나칠 수 있는 가장자리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내 키보다도 높았던 정원의 덩굴들 사이로 들어가니 갑자기 세상과 단절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시끌벅적했던 광장은 어느새 시야에서도 사라지고 그 소리마저도 사라졌다. 거의 30분가량을 이렇게 돌다가 문득 무섭다는 느낌을 받아 서둘러 덩굴을 빠져나왔다. 보통 한 번 갔으면 그곳을 끝까지 탐험해야 되는데, 환승 때문에 시간이 늦어진 점도 있었고 무엇보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호숫가에 앉아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호숫가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여행이 중반부를 넘어서서 그런지 체력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와중 오늘의 일정은 상당히 피로를 유발했다. 미궁을 나와 호숫가에 앉아 맑은 하늘과 호수를 감상했다. 나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곳곳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하나 신기했던 건 호숫가를 중심으로 주변에 실제로 사람들이 사는 주택들이 즐비해있었다. 이런 곳에서 살면 상당히 운치 있을 것 같았고, 다분히 현실적인 '이런 곳은 얼마나 나갈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평화로운 베르사이유 궁전의 뒷뜰


 멍하니 호수 위의 백조들을 바라볼 무렵, 누군가가 반가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바로 전날 함께 투어를 함께했던 일행분 세 명이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얼핏 기억하기로는 한국에서부터 같이 온 친구분들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나름 하루 종일 파리 시내를 함께 돌아본 정이 있어서였을까? 나는 그분들과 궁전 뒤뜰을 함께 구경하기로 했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공원을 산책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을 넘어서 슬슬 내려가고 있었다.


늦은 오후로 접어드는 베르사이유의 하늘


 베르사이유의 궁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항상 이런 풍경을 봐오면서 살아갔던 걸까? 매일같이 이런 환경 속에서 산다면 정말 꿈같은 삶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런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환경 속에 살아왔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닫혀 있던 걸지도 모른다. 세상이 마냥 이렇게 아름다운 줄로만 알았기에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바라볼 생각도, 설사 바라보더라도 공감하지 못한 것이리라. 물론 그것이 면죄부가 되지는 않겠지만. 

 

 베르사이유의 궁전에 온 것은 나에게 있어 매우 큰 의의였다. 작품으로만 접했던 공간을 직접 방문했다는 것과, 이곳에서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인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들었다는 것도 한 몫했다. 여행은 점점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고 간직해온 내 환상들의 체크리스트 역시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사진으로 보면 날씨가 그다지 추워 보이지는 않지만, 기온은 꽤나 내려가 있었다. 거듭된 강행군과 부실한 옷으로 인해 슬슬 감기 기운이 찾아오고 있었다. 일행분들이랑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나, 오늘 무리하면 내일, 그리고 그다음 일정에 영향을 줄 것 같아서 서둘로 숙소로 들어왔다. 파리의 밤을 놓치는 것이 매우 아쉬웠으나 건강하게 여행하는 것 역시 중요하기에 미련을 접어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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