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스탄불 2014 (2)
"자 눈을 감으세요. 여러분은 앞으로 볼 광경을 죽을 때까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실제로 나는 아직도 그 광경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 순간을 시작으로 이스탄불과 사랑에 빠졌다. 원래 예정되어있던 보드룸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이스탄불에 더 머물 만큼 말이다. 물론 애초에 예약 따위 없었기 때문에 부담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날 내렸던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선택을 한 나 자신을 여전히 칭찬한다. 덕분에 이스탄불은 여전히 내 최고의 여행지이자, 누군가에게 항상 0순위로 추천하는 도시다. 그 선택이 아니었다면 이 도시만이 갖는 황홀함을 절대로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이스탄불의 지도가 머릿속에 그려지고, 어디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가 눈에 선하다. 한 도시에 그렇게 오래 머문 적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전날 일찍 잠들어서 그런지 이 날은 일찍 일어날 수 있었다. 숙소에서 친해진 분들과 함께 아침을 먹고, 씻고, 각자 좋은 여행되시라고 인사를 한 뒤 목적지로 향했다. 투어 약속 장소인 술탄아흐멧 공원으로 나갔고, 지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온 지 겨우 이틀째인데 첫날부터 하도 방황을 많이 해서 그런지, 벌써부터 술탄아흐멧 공원이 정겨웠다. 흡사 동네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만남의 광장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향한 곳은 바로 히포드럼이었다. 첫날 질리도록 지나쳤지만 아는 게 없었기에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그냥 길로만 인식했던 곳이었다. 히포드럼은 고대 로마 시대의 마차 경기장이라고 한다. 지금 본다면 '겨우 이게 경기장?'이라고 할 법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래도 꽤나 큰 경기장이었다고들 한다.
마차 경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영화 '벤허'의 유명한 하이라이트 장면이다. 영화로만 보던 장면이 이곳에서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하니까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물론 규모가 로마의 콜로세움 정도는 안 되지만, 그 웅장함은 일정에 있던 로마에서 충족시키기로 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중앙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역시나,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사진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순수 이집트산이고, 나머지들은 모조품이거나 손상된 오벨리스크였다. 나는 이집트를 가본 적이 없지만, 오벨리스크는 여러 번 봤다. 워싱턴, 그리고 얼마 뒤 방문할 파리에서 말이다. 이집트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까? 자신들의 대표적인 유물이 이집트가 아닌 다른 도시에서 공공연하게 '전시'되어 있는 것에 대해 말이다. 나 같은 제3자야 이 덕분에 이집트에 가지 않아도 이 진귀한 조형물을 볼 수 있었지만, 한 번쯤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예레바탄'이라는 곳이다. 예레바탄은 동로마 제국 시대의 지하 저수지다. 당시 기준으로 최대 규모의 저수지라고 한다. 볼거리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여러모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마침 햇살이 쨍쨍해서 더웠는데, 예레바탄에 들어서자마자 서늘한 지하 공기가 몰려와 더위를 달랜 것이 한몫 단단히 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특유의 분위기가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수많은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아마 관광객들이 없고 혼자 왔더라면 절대로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로 어둡고 으스스한 곳이었다. 하지만 오싹함을 느낀 것도 잠시, 그 시대에 이런 거대 시설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확실히 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다웠다. 책으로 자주 보던 로마 제국의 문명과도 닮아있는 모습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나름 이런 쪽에 조예가 깊다고 자부함에도 불구하고 이스탄불에서 만난 유적들은 나에게 매우 생소한 것들 뿐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이탈리아에 있는 로마 문명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왜 이스탄불의 이런 공간들은 쉽게 접할 수 없었던 걸까?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진 뒤 방문한 곳은 성 소피아 성당, 일명 '아야 소피아'이었다. 블루 모스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스탄불 최고의 관광지 양대산맥 중 하나. 비잔틴 문화의 절정이라고 일컬어지며 찬사 받는 건축물이다. 성당의 외입구를 지나 내입구인 '왕의 문'에서 투어 가이드가 해주셨던 말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이 글의 서두에 있는 "자 눈을 감으세요. 여러분은 앞으로 볼 광경을 죽을 때까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라는 말이다.
나를 포함한 투어 일행들은 가이드의 말대로 눈을 감았고, 몇 걸음 걸은 뒤 가이드가 눈을 뜨라고 하자 천천히 눈을 떴다. 꾸밈없는 감탄음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 어떤 훌륭한 사진기도 내 눈으로 본 광경의 느낌을 그대로 담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오랜 시간을 거쳐 완성된 웅장함이 나를 압도했다. 아마 그때의 그 분위기는 잊으래야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같은 소품, 구조, 벽으로 이 건물을 그대로 다시 짓는다 해도 절대 따라올 수 없는 경건함이 건물 구석구석에서 묻어 나왔다. 이곳 역시 블루모스크처럼 그 크기에 비해 내부는 텅 비어있었다. 하지만 블루모스크가 주던 수수한 느낌과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 성당은 화려함과 정교함이 안 들어간 부분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정밀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이름 그대로 '거룩한 지혜' 그 자체의 화신이었다.
소피아 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설계된 건물이라고 한다. 전문가들 말로는 대륙이 흔들릴 정도의 지진이 아닌 이상, 아야 소피아가 무너질 일은 절대로 없다고 했다. 이에 관한 인상적인 설화가 있다.
아야 소피아 건설 현장을 책임지던 한 감독관이 어떤 사내를 만났다고 한다. 처음 보는 자였지만 기품이 흘러넘치고 있었기에, 감독관은 정중하게 그에게 신분을 물어봤다. 그러자 기품 넘치는 사내는 감독관에게 '가서 너의 왕을 불러오라, 내가 기다리고 있겠노라'라고 전했다. 기이하게 여긴 감독관은 이를 왕에게 그대로 고했고, 왕은 감독관에게 말했다. '그분은 천사다. 그 어느 누구도 다시는 그분이 서 계시는 곳에 가지 말라 일러라.'
천사는 절대로 약속을 깨지 않는다고 한다. 왕을 기다리겠다고 약속했기에 천사는 아직도 아야 소피아 어딘가에 서 있다. 그러기에 거대한 지진에도 안전하게 천사의 가호를 받아 멀쩡히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는 천재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도움도 한몫했지만, 이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한다.
아야 소피아에 걸린 여러 벽화들을 보며 상징성에 대해서도 배웠다. 유럽의 대다수 그림들에는 기독교적인 상징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등장하는 그림이 많은데, 몇 가지 상징만 유추한다면 그림의 제목을 몰라도 등장하는 인물을 알아맞힐 수 있다.
예수의 상징은 크게 세 개로 대표할 수 있다.
1. 엄지와 검지로 원모양을 만들고 있다.
2. 푸른색 옷을 입고 있다.
3. 머리에 후광이 있다.
1번은 성인들이 취하는 보편적인 자세라 그렇다 치고, 3번이야 후광이라는 뜻 자체가 성스러움을 의미해서 이해하기 쉬웠다. 허나 2번은 왜 그런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이드분의 말에 따르면, 예수님이 진짜로 푸른 옷을 입어서가 아니라고 한다.
해당 그림들이 유행하던 시절, '아쥬르(Azure)'라 불리는 푸른색 색감은 유럽 내에서 상당히 귀한 재료였다. 그랬기에 그런 재료를 사용하면서까지 그린 사람은 그림 주제의 중심에 서 있는 예수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때 배운 지식 덕분에, 프랑스와 영국을 방문했을 때도 쉽게 그림의 주인공들을 파악해낼 수 있었다. 더불어 왜 톱카프 궁전을 포함해 이스탄불 과거 왕족이 머물던 장소에 푸른색 색감이 많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야 소피아에서 내가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던 장소는 따로 있었다. 바로 엔리코 단돌로의 유해가 담긴 그의 무덤과 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한 벽화다.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은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십자군 전쟁이 몇 차례나 치러진 주요 격전지다. 그중에서도 의의적으로 볼 때 가장 실패한 건 바로 '제4차 십자군 전쟁'이다. 단돌로는 이 십자군을 이끈 장본인이다. 비잔틴 제국을 구하기 위해 시작된 십자군으로 비잔틴 제국을 약탈해버리고 몰락의 길을 걷게 한, 비잔틴 사람들에게는 최고로 악랄한 사람이자 철천지 원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묘를 아야 소피아 내부에 안치했다. 왜일까?
벽화는 곧바로 엔리코 단돌로의 묘를 바라보고 있고, 벽화 밑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 또한 용서하리라'
저 글귀는 비잔틴 말기에 적힌 것이라고 한다. 비잔틴의 쇠락을 초래한 엔리코 단돌로를 용서하겠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당시의 나는 종교가 없었다. 그랬기에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많은 종교에서 하는 말은 그저 듣기 좋은 허울뿐인 소리라고 생각했다. 현실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 지었다. 용서에 관련된 미담을 수없이 들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내게 이 벽화가 주는 의미는 남달랐다. 이걸 보고 당장 내 생각이 바뀐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용서라는 것이 매우 고귀하다는 것을 알려줬다. 아야 소피아 내부의 경건한 분위기가 크게 작용하긴 했을 테지만, 이 당시의 충격과 말로 표현 못할 미묘한 감정은 훗날 나를 크게 바꿔놨다. 이 글을 쓰고 있는 6년이 지난 지금, 나는 용서라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
어딘가에 '혼자' 간다는 것은 당시의 나에게 있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밥을 먹는 일, 영화를 보는 일, 멋진 전시회에 가는 일 그 어떤 것 하나도 혼자서 할 수 없는 나였다. 괜스레 친구 없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오히려 혼자 무언가를 하는 것에 매우 익숙하고,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 되어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이 바뀐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극적으로 바뀔 수 있었을까? 나는 이날 겪었던 일들이 그 변화의 시작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점심을 먹고 우리가 향한 곳은 카디쿄이라는 지역이다. 이스탄불의 세 구역(신시가지, 구시가지, 아시아지구) 중에 아시아 지구에 속하는 곳이다. 이스탄불의 평범한 서민들이 사는 지역으로, 아야 소피아나 블루 모스크처럼 유적지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사실 이때의 나는 너무 신나 있어서, 가이드분이 어디로 데려가든 좋아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디쿄이로 가기 위해서는 어제 '예니 카미'가 있던 에미노뉴 항구에서 페리를 타야만 했다. 한 가지 신기했던 점은, 이스탄불의 교통카드 '카르트'가 있으면 버스, 트램, 지하철, 그리고 페리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교통카드로 배를 탄다는 것은 서울에만 살던 내게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카디쿄이행 페리를 탄 우리는 대략 25분 정도, 금각만의 푸른 파도를 헤치고 카디쿄이 항구에 도착했다.
페리에서 보이는 멋진 광경을 넋 놓고 지켜보는 동안 25분이 훌쩍 지나갔다. 시간이 살짝 촉박했던지라, 주변을 둘러볼 틈 없이 바로 카디쿄이 광장 옆에 있는 시장터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터키스럽지 않은' 모습에 놀랐다. 마치 홍대 거리를 걷는 느낌에 정겨웠고, 고국에 대한 진한 향수에 빠지기도 했다.
버스킹 하면 우리가 흔히 듣는 가요나 팝송의 노래가 먼저 떠오르는데, 이곳에서 듣는 버스킹은 정말이지 '터키의 혼'을 가득 담고 있는 것 같아서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터키어로도 이렇게 신나게 흥겹게 버스킹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이렇게 느낀 관광객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다른 외국인 관광객들도 넋을 잃고 버스킹을 구경하고 있었다.
확실히 시장답게, 온갖 잡다한 물품들을 팔고 있었다. 갓 잡은 생선, 향신료, 각종 먹거리, 화장품 가게, 관광객 쇼핑샵, 환전소, 카페, 기타 등등 없는 것이 없었고 마음 같아서는 모든 가게를 하나씩 다 들리고 싶었다. (허파가 깔끔하게 붉을수록 싱싱한 생선이라는 팁도 득했다)
시장을 한 번 쭈욱 같이 둘러본 뒤, 가이드분이 일행들에게 40분 정도의 자유시간을 주었다. 연인끼리 온 일행들도 있었고, 친구끼리 온 일행들도 있었다. 물론 나처럼 혼자 여행 온 사람도 있었다. 만약 한국에 있었더라면, 혼자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싫어서 어영부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시간을 낭비했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뭉쳐서 그 사람들과 같이 다니느라 '내가 정말 가고 싶은 곳'을 못 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행으로 인해 들뜬 마음 때문이었을까? 이때의 나는 달랐다. 어쩌면 첫날부터 나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 사는 모습들을 보고 싶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면 내 신경이 거기로 쏠릴 수밖에 없고, 그러면 이 공간을 제대로 즐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혼자 다니기로 결심했다. 전날에 혼자서 아무것도 모르는 도시를 알차게 경험한 적이 있다는 것이 자신감을 부채질했다. 혼자 온 사람들이 쭈뼛쭈뼛하게 서로 어디로 가실 거냐고 묻는 사이 난 힘차게 낯선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혼자 돌아다니면서 나 자신조차 신기해서 당황했다. 내가 생각보다 혼자 잘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길거리 주전부리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다. 내가 심할 정도로 단 것을 좋아하는 것도 이 날 처음 알았다. 나도 몰랐던 나 자신을 낯선 이국 땅에서 발견하니 오묘한 기분이었다.
흔히들 여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아간다고들 한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마주치며 나를 더 알아가는 것. 누군가를 알게 되면 그 사람과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무언가를 보며 생각을 나누게 된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간다. '나'를 알아야 한다면 나 자신과 밥 먹고 이야기하고 여러 가지를 보는 게 가장 알맞은 방법이 아닐까? 오히려 익숙함에 가려진 생활보다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진정한 나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이곳 이스탄불에서, 아무 제약 없는 곳에서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자기 자신에 대해 깊게 알아가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도, 남의 눈치를 신경 쓸 일도 아니다. 이때부터 혼자 떠나는 여행만을 고집하는 내가 되지 않았나 싶다.
자유시간이 끝난 후, 우리는 또다시 페리를 타고 유럽 신시가에 있는 항구 '카라쿄이'로 향했다(카디쿄이와는 다르다). 이로써 구시가지, 아시아 지구를 지나 신시가지까지 온 것이다.
가이드분이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딱 이 시간의 카디쿄이와 카라쿄이 항로는 이스탄불에서 석양이 가장 아름다운 장소다. 사진에서 자세히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스탄불의 교통카드 '카르트'의 그림을 보면, 이 항로에서 바라보는 유럽 구시가의 석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절경 중 하나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을은 내가 정말 사랑하는 광경 중 하나다. 여행을 다니지 않을 때도 그렇지만, 특히나 여행을 갈 때는 무조건 하루 정도는 노을을 보기 좋은 곳에 일정을 잡는다. 아마 유럽에서 봤던 아름다운 노을들의 강렬함이 그 뒤의 여행들에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유럽을 여행하며 여러 도시들을 방문했고, 그중 특히 다섯 개의 노을들은 아름다움을 너머 황홀하기까지 했는데, 첫 번째가 바로 이스탄불의 노을이다.
모스크를 배경으로 보이는 이스탄불의 노을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함을 자아낸다. 스타워즈 나부 행성의 모티프가 된 곳이기도 해서 아나킨과 파드메의 슬픈 사랑이 떠올라서였을까? 아니면 노을 시간에 저 멀리서 들려오는 '아잔'(이슬람 국가권에서 기도 시간에 맞춰 거리에 방송해주는 일종의 알람) 소리가 왠지 모르게 구슬프게 들려서였을까?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이 광경에 어딘가 모르게 슬퍼지는 순간이었다.
페리는 카라쿄이 항구에 도착했다.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는 카라쿄이에서 언덕을 조금만 올라가면 볼 수 있는 '갈라타 타워'였다. 갈라타 타워에 올라가는 방법으로는 도보, 그리고 '튜널'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이 튜널은 지하철과 같은 개념이지만,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바로 런던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하철인 것이다. 현대식 지하철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잘 작동하는 것 같았다.
갈라타 타워는 엄청나게 큰 것도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육중한 위압감을 자랑했다. 석양이 발산하는 빛을 받아 오묘하게 반짝이는 것이 한몫했을 것이다. 14~15세기에 제노바 인들이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지은 전망탑. 육중해 보인 건,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지어진 목적 때문일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원래 더 높았으나 아흐멧 2세가 이를 낮추었다고 한다)
갈라타 타워 밑에는 '경주-이스탄불 엑스포'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이곳을 마지막으로 투어는 끝이었다. 갈라타 타워에 올라가지 않냐고 물었더니 가이드분이 대답해주셨다.
"갈라타 타워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투어가 힘들고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곳이라 코스에서 제외했습니다. 투어는 여기서 끝입니다."
이때의 나는 가이드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이 많은 거야 다른 곳도 그랬고, 무엇보다 관광지에 와서 '호불호'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적어도 나는 이스탄불에 있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매력적이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결국 대다수의 일행들은 자신들의 숙소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났고, 나를 포함해 세 명만 갈라타 타워 밑에 남게 되었다.
한 분은 삼십 대 중반 정도 되시는 분이었고, 한 분은 거의 내 아버지뻘 되시는 분이었다. 우리 셋은 갈라타 타워를 올라가기로 결정했고 함께 입장권을 구매해 꼭대기에 도착했다. 가이드분이 왜 '사람이 많다'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전망대 통로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어느 한 곳에 머무를 여유가 없었다. 그저 뒤에서 밀면 앞으로 가고, 이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한 바퀴를 돌아있었다.
탑 위에서 바라본 거리는 꽤나 부산스러웠다.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 이 도시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다. 지쳐있던 몸에 조금은 활력이 돌아오는 계기가 됐다. 조금은 여유를 즐기고자 이스탄불 전역을 둘러봤다.
톱카프 궁전처럼, 금각만을 중심으로 이스탄불의 세 구역이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야경 역시 낮에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력적이었다.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낮의 아름다움을 한 단어로 표현할 때 생기발랄함이라면, 밤은 고혹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런 절경이었다.
나는 늦은 밤에 가끔씩 마실을 즐기며 야경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나에게 있어 갈라타 타워의 야경은 너무나도 탐스러운, 훔칠 수만 있다면 한국으로 훔쳐오고픈 모습이었다. 지금도 야경을 바라보고 싶을 땐, 야밤에 나가 핸드폰에 옮긴 이 사진을 바라보고는 한다.
일행분들 중 한 분은 밤 10시 비행기라며 빨리 떠나셨고, 결국 남은 사람은 내 아버지뻘 되시는 분과 나, 둘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해본 결과 세상은 정말 좁다는 것을 실감했다. 다름 아니라 그분은 나와 같은 동네에 사시는 분이었으며, 심지어 자제분은 내 고등학교 후배였던 것이다.
이것도 인연 아니겠냐며, 그분은 좋은 맛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자 제안하셨다. 어제저녁은 혼자 먹었으니 오늘은 같이 먹는 것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분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갔다. 쟁반 케밥을 파는 음식점이었다.
이곳은 소위 말하는 '로컬 맛집'이었다. 실제로 인터넷을 아무리 검색해도 이 가게에 대한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한국 사이트 한정이긴 하지만...
이스탄불에 오면 꼭 먹어야 하는 세 가지 음식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이미 언급한 오렌지 주스고, 이게 바로 두 번째 음식이다. 양, 소, 닭으로 구성된 꼬지와 여덟 가지 야채, 그리고 구운 빵을 곁들여 먹는 쟁반 케밥은 어제 먹은 쾨프테시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맛있었다. 어제저녁에 먹은 케밥이 살짝 관광객들을 위해서 가공된 맛이었다면, 쟁반 케밥은 현지인들을 위한, 정제되지 않은 토속적인 맛을 함유하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는 터키식 향이 입맛에 맞았는지 아주 맛있게 저 모든 것을 비울 수 있었다. 특히나, 이스탄불 사람들이 하루에 세 잔 이상 마신다는 '차이'라는 차는 자극적인 케밥의 맛을 달짝지근하게 잘 잡아줬다.
함께 저녁을 먹은 일행분들과 헤어진 뒤, 나는 교통수단 없이 숙소까지 걸어왔다. 40분 정도 되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거리였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쳤지만 정신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인한 순간이었다. 이 시간의 이스탄불을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눈에 담고 싶었다. 너무 알차게 보냈던 하루였기에, 순식간에 사랑에 빠져버린 도시였기에 이 도시의 아름다운 모습을 구석구석 느끼기를 원했다. 아마 오늘이 이스탄불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고, 다음 날에 보드룸으로 가는 일정이라 더 소중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벌써 이 도시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이 밀려들어왔고 그랬기에 더더욱 마지막 순간을 피부로 느끼기로 결심한 것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떠나기 싫다는 마음의 소리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떠나기 싫었다. 떠날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이제 막 이스탄불에 강한 애착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 이 매혹적인 도시를 이대로 떠난다는 건 내 인생에서 손꼽히는 후회로 남을 것만 같았다. 갈라타 타워 밑에 있는 공예품 거리에서 구경하고픈 것도 산더미였고, 아직 못 가본 유명한 관광지도 많았다.
이제야 막 이스탄불 여행이 시작된 것 같은데 벌서 떠난다니 어불성설이었다. 내 발걸음이 술탄아흐멧 광장에 도착했을 때쯤,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보드룸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취소했다. 숙소 카운터에 가서 무려 1박도 아니고 2박을 더 하겠다고 전한 다음 추가 비용을 결제했다. 참 대책 없는 결단이었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었고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서른 살인 지금, 성인이 된 이후로 내가 여행을 다녀온 도시들은 총 19개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던 여행들 중에서도 이때만큼 대책 없고 돌발적인 선택을 했던 적은 없던 것 같다. 이스탄불은 그만큼 나에게 큰 감명을 준 도시다. 마법에 걸린 게 분명했다. 그 순간에 확신했던 것이다. 이 도시는 내가 앞으로 가장 사랑할 도시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