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스탄불 2014 (3)
"한 사람이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기에 이 도시가 이렇게 아름다워질 수 있었던 건 아닐까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 한 번쯤 살아가면서 들어봤을 법한 익숙한 이름이다. 다빈치는 전 세계에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위대한 건축가이자 조각가다. 하지만 '미마르 시난'이라는 이름을 들어봤냐는 물음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대답할까? 나에게도 역시 매우 생소한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허나 그는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 가는 위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실제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매우 존경할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스탄불의 가우디 같은 존재다. 이스탄불의 아름다움 곳곳에 그의 손길이 묻어난다. 그랬기에 나는 그 이름을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이른 아침부터 오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했다. 종이지도를 펼쳐보니, 지난 이틀간 금각만을 중심으로 한 관광지들은 대부분 돌아본 것 을 깨달았다. 문득 첫날 혼자서 방황하던 때, 저 멀리 보였던 거대한 성벽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아마 이 도시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까맣게 잊었을 기억이지만, 지금은 그때와 비교해 관심 자체가 달라졌기에 그런 작은 부분들까지도 궁금했던 게 아닐까 싶다. 알음알음 검색해보니 그 성벽의 이름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라고 한다. 그제야 어제 가이드가 해주셨던 말 중, 이스탄불이 난공불락의 도시였던 이유 중 하나가 테오도시우스 성벽 때문이라는 게 생각났다. 나는 고민의 여지없이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대중교통에 익숙해진 나는 술탄아흐멧 역에서 파자르테게 역으로 향하는 트램을 탔다. 트램역에서 내리자마자 거대한 성벽에 시야를 가득 메웠다. 생각보다 오래된 것 같지 않은 성벽이 대로 양쪽을 차지하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성벽의 중앙에 8차선 차로를 내서 그 사이에 차들이 다니는 구조였다.
보통 유적지들은 방책을 치든 다른 장치를 구비해서 보존하는 것이 내가 보던 방식이었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랬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달랐다. 누구나 만질 수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들어가 볼 수도 있었다. 모험심이 발동한 나는 성벽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결정했다. 성벽 안으로 가는 길을 나무와 험난한 지형들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장애물들이 있었기에 모험하는 느낌을 들게 해서 더 신났던 것 같다. 참고로 주변에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성벽 안, 조금 높은 곳에서 맑은 하늘을 한창 감상하던 나는 성벽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제대로 느끼려면 내가 온 곳과 반대편 방향에서 성벽을 봐야 한다. 그 이유인즉슨,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콘스탄티노플을 수호하는 성벽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는 방향에서 이 성벽을 바라봐야 그 위용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즘에야 워낙 고층 빌딩들을 많이 보니까 엄청 높아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당시 기준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성벽을 바라보면 꽤나 높이 느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저 먼 옛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야 했던 지휘관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해봤다. 아마 그들도 나와 같은 암담함을 맛봤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사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그렇게 인기 있는 관광명소는 아니다. 주변만 둘러봐도, 이스탄불에서 테오도시우스에 몇 시간이 투자한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오히려 이 사실이 더욱 나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이곳에서 감명받았던 나의 그 순간이 특별하고 소중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만이 느낀 여행의 감동인 것이다. 그 이유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테오도시우스 성벽 앞에 놓인 공원이었다. 뉴욕에 센트럴파크가 있다면, 이스탄불에는 톱카프 공원이있다.(톱카프 궁전과 이름만 같을 뿐, 거리상으로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헷갈리지 말자.)
거대한 유적지 옆에서 평화롭게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 벤치에 앉아서 케밥을 먹는 사람들을 보니 자연스레 마음이 평안해졌다. 여태까지는 휙휙 지나가는 바쁜 여행을 했다면, 이 순간만큼은 그들 덕분에 내 여행마저도 덩달아 여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공원 잔디에 앉아 피크닉을 즐기는 것은 상당히 서구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당장 중국이나 일본을 떠올리면서 '공원, 잔디, 피크닉'이라는 단어를 연상하지 않듯 말이다. 내가 이스탄불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동서양의 문화가 가장 성공적이고 조화롭게 어우러져서이다. 톱카프 공원 역시 그 예 중에 하나다. 확실히 이슬람 국가 중 가장 서구화된 곳이라 그런지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전통을 소홀히 하는 것도 전혀 아니었다.
좀 전의 공원에서 느꼈던 여유가 전염된 것인지 왠지 모르게 여유롭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공원에 앉아서 숙소에서 가져온 이스탄불 여행 책자를 뒤적거리다가, 신시가지에 있는 돌바마흐체 궁전에 가보기로 했다. 에미뇨뉴까지 트램을 타고 간 다음, 유럽 신시가로 가는 트램으로 갈아타면 대략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돌바마흐체 궁전이 있는 '카바타시'역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11시 정도였던 것 같다.
역대 최고 정치적 권력자인 '술탄'들이 거주했던 돌바마흐체 궁전은 역시나 화려했다. 바다를 메워서 간척한 곳에 세운 이 궁전은 원래 술탄 아흐멧 1세가 휴식처로 쓰던 건물이었다. 술탄 압둘 마지드가 1853년에 대리석으로 새로 건축했다고 한다. 그 모습이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서 그런지 유럽의 향기가 곳곳에서 느껴졌다. 아직 유럽에 가본 적도 없지만...
정원을 천천히 관람하다가 더 깊숙이 들어가자, 돌바마흐체 궁전 본관이 나타났다. 워낙 유명한 명소이기도 하고,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니, 다른 관광지처럼 표를 끊고 바로 들어가는 방식이 아니었다. 표를 산 사람들은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본관 앞에 또다시 줄을 서야 하고, 일정 인원이 채워지면 그 인원들을 데리고 전담 가이드가 이들을 본관 내부로 안내한다. (내부에서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었다.)
궁전 내부에는 오스만 제국 시절, 각국의 사절들로부터 받은 희귀한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역시나 오스만이라는 제국이 역사에서 손꼽히는 제국이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이날 따로 투어를 신청 안 했지만, 궁전에서 자체적으로 안내해주는 가이드가 있어서 그런지, 그냥 봤으면 지나칠만한 것들에 대해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돌바마흐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중 첫 번째가 바로 '황제의 방'이다. 이곳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한, 750개의 전구로 장식된 샹들리에가 장식되어 있는데, 아마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렇게 거대하고 아름다운 샹들리에를 볼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촬영 금지가 상당히 아쉬웠다.
두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건, 터키의 정신적 지주라 불리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의 방이었다.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방이었는데, 그곳의 모든 시계가 9시 5분에 맞춰져 있었다. 바로 아타투르크가 서거한 시간이다. 해마다 아타투르크의 사망일, 9시 5분, 터키 곳곳에서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마침 이날 다음날이 서거일이라 그 행사를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아타투르크라는 이름(투르크의 아버지)을 부여받은 만큼, 그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새삼 알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을 딴 아타투르크 공항, 모든 화폐에 새겨져 있는 그의 얼굴, 이스탄불 어느 곳을 가도 볼 수 있는 그의 초상화. 시간이 나면 아타투르크에 대해 진지하게 알아보겠다고 생각했다.
이스탄불에 대해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사람이 있다. 사실 이스탄불에 대해 조금만 적극적으로 조사를 하면 절대로 안 마주칠 수 없는 이름이다. 바로 '미마르 시난'이다. 미켈란젤로가 존경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상당히 낯선 이름이다. 아마 역사의 승리자가 서방세계이다 보니 동방의 천재가 상대적으로 부각이 덜 된 것 같았다. 나 역시 이스탄불에 가서 이 사람에 대해 처음 알았으니 말이다.
미마르 시난은 기독교 집안의 자제이자, 슐레이만 대제의 예니체리였다. 허나 일찍이 미마르 시난의 재능을 알아본 슐레이만은 그에게 건축일을 맡기게 되었고, 이게 바로 이스탄불이 아름다운 도시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우리가 이스탄불에 가서 볼 수 있는 웬만한 건축물들은 99%가 미마르 시난의 손에서 탄생했거나, 조정받았다고 보면 된다. 나처럼 이스탄불에 오래 있었던 사람들은 분명히 알 것이다. 이스탄불은 매혹적인 도시라는 걸. 미마르 시난은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처럼 조각상, 그림을 만든 천재가 아닌, '도시'를 만든 최고의 예술가이자 건축가인 것이다.
그 아야 소피아의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설계한 것도 미마르 시난, 아름다운 블루모스크를 지은 것도 미마르 시난의 제자들이다. 아야 소피아와 관련한 미마르 시난의 일화를 짤막하게 소개하려 한다. 아야 소피아가 많이 노화되자, 건축가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어 이 위대한 건축물을 보수할 방법을 강구했다. 그들은 마침내 해답에 이르렀고, 이를 위해 필요한 부분을 걷어내고 보수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그들이 걷어내려고 했던 건물의 한 부위에서 오래된 문서가 발견됐다. 현대어로 간략히 직역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당신들이 이 문서를 본다는 것은 시간이 흘러 아야 소피아가 낙후되어 보수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거겠지요. 보수가 필요한 부분을 정확히 잘 짚어냈습니다. 여기 이 문서에 있는 부분을 참고하여 보수에 착공한다면 이 건물은 더욱더 오래 견고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마르 시난이 남긴 문서였다. 그는 정확히 어느 시점에 어느 부위가 보수가 필요할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고, 후대의 건축가들을 위해 그 부분에 문서를 남겨둔 것이다. 실로 경이로운 능력이다. 이는 미마르 시난의 천재성을 알리는 여러 일화 중 극히 일부다.
미마르 시난은 미흐리마 공주를 매우 사랑했다. 미흐리마 공주 역시 미마르 시난을 사랑했다. 그녀는 슐레이만 대제의 딸이었다. 이스탄불에 있는 미흐리마 술탄 모스크는 미마르 시난이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만든 모스크인 것이다. 물론 둘은 이어질 수 없었다.
신분의 차이 때문은 아니었다. 슐레이만 대제 역시 미마르 시난을 그 누구보다 아끼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가장 큰 장애물이 되었던 건 두 집안의 종교적 차이었다. 이슬람 집안과 기독교 집안이 맺어진다는 건 그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이슬람 집안이 다른 누구도 아닌 술탄의 집안이라면 말이다.
미마르 시난은 평생 동안 미흐리마 공주를 사랑했고, 결국 그녀에게 최고의 생일선물을 해주기에 이른다. 사실 미흐리마 사원은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다. 매년 미흐리마의 생일, 춘분 때,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이 온다. 그리고 그 날, 두 개의 미흐리마 사원의 각 첨탑에 해와 달이 동시에 하나씩 걸리는 절경을 바라볼 수 있다. 이 광경을 연출하기 위해 그는 천문학을 집중적으로 탐독했다고 한다. 미마르 시난이 미흐리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날이 슬슬 저물었고, 오늘 마지막 일정으로 금각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피에르 로티 언덕에 가기로 했다. 피에르로티 언덕은 에윱지구에 있다. 에윱항에서 내려 조금 걷다 보면 피에르로티 언덕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가 나오는데, 10분이면 언덕 끝까지 올라갈 수 있다. 케이블카 역시 이스탄불 카르트로 계산했다.
피에르 로티는 프랑스의 해군 장교이자 작가다. 그가 이스탄불에 머물 당시, 이스탄불의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자주 만남을 갖던 곳이 이 언덕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프랑스를 갔다 온 사이 그 여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피에르 로티는 그녀를 그리워하며 이 언덕에서 집필활동을 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 언덕이 피에르 로티라 불리게 됐다. 그가 말하길 이곳에서 보는 이스탄불의 절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사진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곳은 유럽 구시가이며, 왼쪽에 보이는 것은 유럽 신시가다. 수많은 차량들이 열을 지어 나아가는 모습이 빛이 파도와도 같았다. 응봉산에서 내려다본 한강대로를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짙은 향수를 느꼈다. 심지어 옆에 있는 레스토랑에서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청각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반가운 순간이었다.
어째서인지 이스탄불에는 로맨틱한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물론 이곳이 첫 여행지라 모든 것이 새로워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이스탄불에서의 로맨틱한 이야기가 가장 와 닿았던 것 같다. 그건 아마도 이 도시 자체가 로맨틱해서 그런 것 같다.
이스탄불은 애절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이스탄불 이후로도 꽤 많은 도시들의 야경을 바라봤다. 하나하나 버릴 것 없이 아름다운 곳들이었다. 하지만 이스탄불만큼 내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야경은 없었다. 예쁘다는 표현이 먼저 나오는 곳은 있었어도, 슬픈 감정이 아름다움을 몰고 오는 도시는 이곳이 유일했다. 다른 의미로 내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곳은 훗날 타이페이가 었었지만, 그 감정이 그리움에 더 치우쳐 있다면 이스탄불에서의 감정은 슬픔에 가까웠다. 젊었던 내 청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곳이 나에게 첫 여행지라 그랬던 걸까? 어쩌면, 이 도시의 대부분을 설계한 미마르 시난의 아픈 사랑이 도시 구석구석에서 묻어 나와 그런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