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때 거기
재작년에 몇 번이나 다녀왔지만 느긋한 마음으로 애인과 같이 제주도를 방문한 건 이제야 두 번째였다. 이제 더 이상 도민이 아니라는 쓸쓸함은 지난 지 오래다. 그때 우리는 스쿠터를 타고 다녔는데. 숲을 지나 마방목지를 지나 갈대밭이 펼쳐지면 나지막이 탄성을 지르곤 했는데.
계획은 따로 필요 없었다. 그때 거기. 아는 사람이 드문드문 있고 어디에 뭐가 있는지 빤히 아는 곳. 이제 해외든 국내든 여러 여행의 기억들을 엮어 마음이 누긋해지는 곳에 풀어내는 능력이 생겼다. 여러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기에 좋은 다양한 풍경, 마음이 풀어지는 고향 같은 곳. 어깨에도 팔에도 타인이 걸리지 않는 자유로움. 소리와 빛이 빈 곳에 그 어둠만큼 내가 커져 더 들리고 더 보이는 감각.
여기서 다시 삶을 꾸리면 어떨까, 상상했다. 좋아하던 카페는 이사를 했다. 어색함 반 반가움 반으로 자리에 앉는데 자동으로 와이파이가 잡혀서 마음이 푸근해졌다. 몇 번 이사를 해도 친구들은 우리 집에서 첫 자취방의 기운이 풍긴다 했다. 다시 여기 온대도 그런 마음이겠지.
물이 잘 빠지는 현무암 재질의 섬에 인공으로 고무를 덧대어 호수를 만들 만큼 잘 가꾸어진 타운하우스 한복판에서는 이런데 사는 건 무척이나 평화롭고 건강하게 매일 다도를 즐기는 그렇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평화롭게 죽음을 기다리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평생 일해도 절대 여기 살 일은 없으니까 심통 나는 거겠지.
공간의 힘이 크다. 좋은 공간은 어쩌면 도시에 더 많다. 그러나 도시의 사람은 만성으로 시간이 부족하고 좋아할 법한 장소는 늘 멀리 있다. 가는 길에 뭐 바람소리, 나뭇잎 소리, 새소리를 들으면서 멍 때릴 수 있나 도착하면 뭐해 사람이 빛이 소리가 꽉 차 있다. 그리고 언제나 쉬이 사라지지. 이런 도시에서의 매력은 '공간'이 아니라 '활동'이다. 그 자체로는 얻을 수 없고 애써 무언가를 해야만 얻을 수 있는.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육지에서는 아무래도 마을 그 이상의 범위는 내동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제주는 (이방인에겐) 섬 그 자체로 한 단위로 느껴져 동쪽 서쪽 기웃거리며 조금씩 내가 있을 자리로 만드는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오일장에서 사 와 심어두었던 로즈메리는 숲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