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리듬을 새로 짜느라 힘들었던 거구나. 이제야 좀 익숙해졌네
오랜만에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섬에 대한 향수는 어떠냐고. 엇 요즘엔 별로 생각 안 해봤는데.
작년 다시 육지에 왔을 때만 해도 하나도 안 괜찮았다. 뭐라도 하긴 해야 될 것 같아서 밖으로 나가긴 하는데 복잡하고 넓고 뭔가가 많은데 나는 없는 느낌. 좁은 공간에 사람도 가게도 빽빽해서 정보가 너무 많아졌다. 비슷비슷한 골목에, 수많은 지하철 출구에, 최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외워둬야 할 플랫폼 번호까지 한 번 움직이려면 확인해야 할 정보 투성이. 폰은 데이터를 너무 많이 소진해버린다.
고속터미널에 들른 적이 있다. 지상, 지하, 센트럴 어쩌고에 백화점에 뭐가 이렇게 많은지. 방향만 명확하면 어디로든 통했던 섬에서의 버릇이 몸에 배어 그냥 냅다 걸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어진다. 막혔는지, 뚫렸는지, 위층인지 지하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마치 2D 세계에서 3D 세계로 처음 들어온 기분이다. GPS가 삼차원 정보는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난 업데이트되지 않은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지쳐서 뭘 일단 먹으려는 데 앉을 데도 없다. 나가서 걷고 지치면 또 들어가고. 화려한데, 재미없다. 또 다른 날.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이전에 알아두었던 커피숍을 가기 위해 동대문에서 광화문까지 걸어가려는데 스타벅스가 보인다. 또 보인다. 온몸이 젖어서는 생각한다. 그냥 이쯤에서 들어갈까. 너무 빽빽한 이 곳에서는 쉬이 타협해버린다. 정말 맘에 드는 한두 군데 들러 걷고, 멍 때리고. 그리고 장 봐서 집에서 놀멍 쉬멍 하던 때가 떠오른다.
섬에 있을 땐 잘 들르지 못했던 할머니 집에도 들른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대화. 아침 정보 프로그램의 연예인 이야기라도 주절주절 이어진다. 약속이라도 하나 잡으려면 또 어떻게. '이번 주 금요일 갑자기 약속이 생겨서' '그럼 그다음 주 수욜' '아니 그날은 회식' '그럼 목욜' '응 일단 오케이' 빽뺵이 들어차 자잘히 기억하고 조율해야 될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나는 일상에 쏟을 수 있는 에너지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 사람. 일상성에서 벗어나는 일을 별로 안 한다. 웬일로 집중해서 힘을 낸다 싶으면 알던 사람이랑. 약속을 가끔 잡더라도 헐겁게 대충 '이 날 이때쯤?' 별 기대도 없고 약속이 바뀌어도 산책하면 되지 뭐. 집에서 뒹굴거리거나.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지내다가 가끔 내 바운더리가 너무 좁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땐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좋다. 좋은 사람들과의 시간은 늘. 그렇지만 꽤 지쳐서 집에 들어오곤 한다. 의외의 힘을 받고 오기도 하지만..
글쎄 이젠 적당히 익숙해진 건지 무리하지 않게 된 건지. 내 집과 나의 일상을 세우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되었다. 우리 집? 아직도 멀었다. 버릴 것도 너무 많고 박스도 뜯지 않은 채로 그냥 두었고 신발장도 사야 되고 선반도 사야 되고 다시 추워지니 문풍지도 뽁뽁이도 다시 마련해야 될 거고 베란다에 작은 수납장도 있었으면 좋겠고. 그런데 이상하게 집에 들어오면 나쁘지 않다. 내 방식대로 최적화되었나 봐. 육지에 오자마자 새로 산 관절 조명. 가성비가 좋고 활용도가 좋은 최소한만으로 사둔 공간박스들. 마음에 쏙 들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납득할만한 짐들.. 한 공간에 한참 있을 거란 확신이 없으니 오래갈 가구도, 집에 정도 담뿍 쏟진 못했지만 나름대로 길들여왔다. 주중? 별 약속 없이 퇴근하고 나면 운동을 한다. 간단한 것을 사 먹고 집에 돌아온다. 넷플릭스를 켜고 내키면 차를 우려먹는다. 주말? 섬에서는 정복할 수 없었던 육지의 공간들을 많이 다녀본다. 작은 전시공간들, 아지트가 될지도 모르는 식당, 바, 카페. 가끔은 교외, 그리고 무엇이라도 배울 수 있을 것 같은 기회의 공간들.
일은 일대로 방황하며 달려가고 생활은 생활대로 나름대로 안정되어 간다. 올해가 가기 전엔 요리도 다시 해야지. 핑계 대느라 아직 루틴화하지 못했다네.
일상이 다져진다면 일상의 힘으로 열심히 살고 싶기도 하고. 육지에 돌아온 지 1년. 이렇게 적응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