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에 내려오니 먹을 게 풍년이다. 서울에선 없던 입맛이 여기서는 왜 이렇게 살아나는지, 근 일주일 만에 몸이 무거워진 게 느껴질 정도로 살이 쪘다. 야식이라도 안 먹으면 덜 찌련만 그 유혹이 워낙 강하니 당해낼 도리가 없다. 무엇이 나를 유혹하냐고?
"저녁에는 호빵 쪄먹자~"
우리 집 선반을 가득 채운 호빵, 그 호빵이 바로 주범이다. 엄마의 말에 '아니, 난 됐어.'라고 말해야 하는데, 스멀스멀 올라가는 입꼬리를 멈출 수 없다. 나는 항복하기로 한다.
"엉, 좋아!"
다이어트는 서울에 올라가서 해도 괜찮을 거라며 자기 합리화까지 마치고서 말이다. 벌써 머리 위로 모락모락 호빵이 떠오른다. 오늘은 두 봉을 쪄야지. 아빠도 호빵 귀신이니까.
저녁상을 치우고 설거지까지 마친 후, 찜기를 올려놓았다. 그 안에 호빵을 하나씩 놓고 있는데 뒷정리를 하던 엄마가 불현듯 말을 꺼낸다.
"있잖아. 옛날에는, 응? 할머니가 호빵을 직접 쪄줬거든."
할머니? 우리 외할머니, 아니면 엄마 외할머니? 하고 물으니 엄마가 '엄마 외할머니.' 한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증조할머니가 되는 분이 직접 호빵을 쪄주셨다고. 만두도 아니고 호빵을 직접 해 먹는다는 건 또 처음 들어본다. 깜짝 놀라 '직접 만드셨다고?' 하니, '응, 직접 하셨다니까~'하는 대답이 되돌아온다. 엄마의 음식 손재주는 외할머니로부터, 외할머니의 손재주는 증조할머니로부터 다 대대손손 이어진 거구만. 나는 그럼 뭐지? 별안간 내 요리 솜씨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 학교 마치고 집에 가면, 아랫목에 냄비가 있었거든. 바닥이 뜨끈뜨끈하니까 거기서 반죽을 발효시킨 거야. 거기에 팥도 엄마 외할머니가 직접 삶아서 쪄주셨어. 요즘 파는 거랑 맛이 달라. 얼마나 맛있었는데."
추억에 잠긴 엄마는 연이어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할머니 술빵도 진짜 맛있었어. 막걸리로 해가지고 정말 맛있었거든. 근데 네 할머니는 그걸 할 줄 모르니까, 엄마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는 못 먹었지. 그리움과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말투였다. 나는 그저 할머니가 못 하는 음식도 있냐며 허허, 웃을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많이 들어본 적이 없다. 드물게나마 들었던 이야기의 대부분은 엄마 외할머니, 즉 증조 외할머니의 이야기였다. 초등학교 때 담벼락 너머에서 엄마의 도시락을 들고 서계셨다던가, 어떤 음식을 특히 잘하셨다던가, 하는 이야기들. 특별히 내색하지는 않지만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엄마에게 증조 외할머니가 어떤 존재였는지 알 것만 같기도 하다. 십수 년이 지난 후에도 그 음식의 맛과 다정한 손길이 기억나는, 그런 따뜻하고 커다란 존재였겠지. 아마 사는 동안 평생 잊지 못할.
나는 엄마 나이가 되면 무엇을 추억할까? 길거리에서 호빵을 보면, 지금 이 순간 엄마 아빠와 밤에 호빵을 나눠먹던 것을 추억하게 될까? 앉은자리에서 서너 개는 거뜬할 만큼 호빵 귀신인 아빠 얼굴이 떠오르진 않을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진 않을까?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순간들을, 그때는 그리워하게 될까?
단골손님이 우스갯소리로 '엄마 요리하는 것 좀 배워놔. 엄마 요리 잘하잖아.'하고 말할 때, '아이, 엄마는 요리 눈대중으로 하는 거라서 못 배워요.'라고 대답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안에는 언제고 원할 때마다 엄마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겠거니, 하는 나의 안일한 생각이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간을 보라며 나물을 집어다 먹이는 사람이, 좋아하는 반찬을 끌어다 주는 사람이, 내 밥숟갈 위에 맛있는 고등어 조각을 올려놓아주는 사람이, 항상 곁에 있으리라는 생각이.
그러나 나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먼 훗날 엄마가 없을 때 그 맛을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을 후회할지는 모르지만, 지금만큼은 엄마 음식은 엄마가 해서 맛있는 거라며 어리광 부리는 철부지 딸이고 싶다. 맛있는 반찬에 엄지를 척 들어 보이는, 칼 하나 쥐는 것도 조금은 불안한 엄마의 아이로 있고 싶다. 그런 내 곁에 언제나 엄마가 기쁜 얼굴로, 때로는 염려스러운 얼굴로 있어주었으면 하니까.
다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순간들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면, 나는 이 모든 날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담아둘 것이다. 글을 써서 기록하고, 사진을 찍어 간직할 것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바래지 않을 순간으로 남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리워지는 계절에, 언제든 이날의 추억을 모락모락 피어 올릴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