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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흰머리

불량품이 가득한 아빠의 머리 공장

by 김해뜻




아빠는 공장을 운영하신다. 이름하야 '곱슬머리 공장'. 아빠 머리에는 매일 같이 새로운 곱슬머리가 자라난다. 오래된 머리카락은 빠지고, 그 위로 새로운 머리카락이 자라나고. 그 세월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불량품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게 바로 '흰머리'다. 아빠 공장에서 불량품이 발견되기 시작한 지는 아마 한 30년쯤 되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우리 남매는 불량품 선별 작업 인부로 투입되었다. 장비로는 족집게 하나와 노란색 박스테이프만 덜렁 들고서 말이다. 동생과 나는 사이좋게 아빠 머리맡 양쪽에 앉아서 흰머리를 찾고 뽑아내기 시작했다. 물론 노동의 대가는 있었다. 한 올에 10원, 그러니까 100개를 뽑으면 천 원으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수 있었다. 우리는 작고 소중한 용돈을 얻기 위하여 매일 밤 선별 작업에 매진했다. 아빠의 머릿속을 열심히 뒤져서, 흰머리를 발견해내면 그것을 뽑는다. 뽑은 머리는 노란 박스테이프에 붙여둔다. 박스테이프에 빈 공간이 없어질 정도가 되면 뽑은 개수를 이야기하고 용돈을 받아가는 게 매일 저녁의 일과였다. 항상 시작할 때 TV를 보고 있던 아빠는, 다 뽑았다고 말할 때 즈음에는 꾸벅꾸벅 졸고 계셨다. 다 했다고 깨우면 붉어진 눈을 꿈벅이면서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몇 장을 꺼내 건네주곤 했다.


연식이 오래된 기계가 으레 그렇듯, 해가 갈수록 불량품의 수가 많아졌다. 무슨 말이냐면 흰머리가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100개 뽑는 데도 몇 시간이 걸리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같은 시간에 200개, 300개 뽑는 게 가능해졌다. 눈에 불을 켜고 흰머리를 발굴해내는 나와 동생의 노력 끝에 아빠 머리는 그런대로 본연의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검고 곱실거리는 머리칼은 아빠의 젊음을 증명해주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우리들이 일찍이 본가를 떠나 살기 시작하면서 그 불량품을 색출할 인력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흰머리는 자꾸만 늘어가는데 뽑아줄 사람은 없으니 아빠의 머리는 점점 색을 잃어갔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아빠 머리에는 불량품들이 자꾸만 쌓여갔다.


내가 성인이 된 이후 어느 날은, 아빠의 머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제는 가까이서 보거나 손으로 헤집지 않아도 흰머리가 눈에 선명히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심각성을 느낀 나는 아빠에게 제안했다. 염색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처음에 완강히 거부하던 아빠는 나의 설득 끝에 결국 소파 아래에 앉았다. 나는 소파 위에 앉아서 아빠 어깨에 비닐을 두르고, 염색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약을 짜는 것을 바라보던 아빠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아빠는 검은 머린데 왜 염색약은 하얀 거냐며. 이상하게 되는 것 아니냐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원래 이런 색이고 시간 지나면 까매지니까 걱정 마시라고 말했다. 아빠는 여전히 미심쩍은 듯한 눈길을 보냈지만, 완강한 딸의 말투에 포기했는지 어깨에서 힘을 뺐다.


염색약을 바르는 와중에도 아빠는 중얼중얼거렸다. 염색약이 눈에 안 좋은 거라던데 괜찮은 거냐는 둥, 피부에 묻으면 안 지워지는 거 아니냐는 둥, 처음에는 성의 있게 대꾸해주던 나는 이내 입을 다물고 열심히 염색약 바르기에 열중했다. 이런 건 백 번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결과로 한 번 보는 게 제일 빠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꼼꼼하게 약을 바르고 있으려니, 아빠의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슬쩍 보니 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잠에 빠진 건 아닌지, 내 눈길을 느낀 아빠는 졸린 말투로 대답했다. 아빠는 머리만 만지면 졸려. 그러고서는 또 꾸벅꾸벅.


염색약을 다 바르고 몇 분이 지난 뒤에, 얼른 깨워 머리를 감고 오라 하니 아빠는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머리를 감고 말리는 걸 뒤에서 지켜보며 나는 호들갑을 떨었다. 거 봐요, 아빠! 훨씬 젊어 보이는 구만! 예전처럼 온통 검어진 곱슬머리가 거울로 보였다. 아빠도 만족스러운 듯 씩 웃었다. 그러게, 진작 할 걸 그랬다. 하고 말하며.


생애 첫 염색을 마친 아빠는 나와 함께 셀카를 찍었다. 물론 내가 억지로 졸라 찍었지만, 아빠도 썩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사진을 넘기는 아빠의 검지 손가락을 옆에서 보는데 별안간 코끝이 찡해졌다. 젊어진 아빠 머리를 보니 지금보다 더 반짝였던 아빠의 옛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간 염색 한 번 해주지 못한 나 자신이 조금 밉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가는 건 자연스러운 거고, 아빠의 머리도 언젠가 모두 하얗게 변할 것이지만 그래도 아빠의 젊음을 조금이라도 붙잡아둘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아빠의 흰머리는 검은 머리 사이에서 불량품으로 치부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아빠의 공장은 매일매일 돌아가고 있고, 하룻밤 사이에 불량품이 수도 없이 많이 나오고 있다. 나는 그걸 매일매일 봐줄 수는 없지만, 가끔씩 들여다보며 색을 칠해줄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그것이 무의미해지는 때가 올 것이다. 모든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 버리는 때가.


그때는 아빠의 흰머리를 불량품이라 말하지 않고 이렇게 명명하고 싶다. 그건 그냥 아빠의 세월이고, 삶의 기록이라고. 우리를 위해 내내 빛나다 바래버린 젊음이라고.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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