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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뜻 Feb 13. 2021

나는 아빠의 걸음걸이를 닮았다

국화빵 딸래미의 아빠 걸음걸이 관찰기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민박집에 친구가 잠시 머물다 갔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친구는 엄청난 걸 발견했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 나, 여기 와서 느낀 게 있어. 나는 친구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어떤 거?"

    "아버님이랑 너랑, 걸음걸이가 똑같아!"


    걸음걸이가 똑같다고? 살면서 아빠 닮았다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봤건만, 걸음걸이까지 닮았다는 말은 처음 들어본 탓에 나는 다시 한번 되물었다. 친구는 고개를 열심히 흔들면서 '응. 진짜 똑같아.'하고 답했다.


    친구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아빠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보았다. 약간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상체는 조금 뒤로 빼고, 터덜터덜 걷는다. 서있을 때는 짝다리를 짚고, 보통 손은 허리춤에 놓는다. 내가 저렇게 걷나? 미심쩍은 눈으로 지켜보는데 아빠 옆으로 오빠가 지나간다. 세상에, 똑같이 걷는다. 나는 반찬을 담는 엄마 옆으로 간다. 소곤소곤 이야기를 꺼낸다.


    "친구가 그러는데, 나랑 아빠랑 걸음걸이가 똑같대."

    "그래?"

    "응. 근데 오빠도 똑같이 걷는다. 봐봐."


    엄마는 슬쩍 보더니 그러게, 하며 웃는다. 어떻게 걸음걸이가 같지? 같이 산 세월이 긴 것도 아닌데. 의문스러워하는 내 말투에 가족끼린데 닮을 수도 있지, 뭐 하는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왔다. 응, 그럴 수도 있겠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딸은 아빠를 닮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특히나 첫딸은. 삶의 대부분을 평범하게 살아온 나는 역시나 예외 없이 그 진리를 따랐다. 어렸을 때는 아빠 반, 엄마 반이라는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다 자란 지금은 처음 보는 손님들도 '딸이 아빠를 엄청 닮았네'하고 말씀하신다. 그래도 엄마 얼굴 반은 공평하게 가져왔다고 우기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아빠의 국화빵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굴, 특히 눈이나 코, 얼굴형이 아빠 판박이라고만 생각해왔다. 오늘은 거기에 '걸음걸이'라는 새 항목이 추가된 것이다. 이것도 아빠와 나의 '국화빵' 카테고리에 추가해야 하는지 증명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빠의 걷는 모습을 그렇게 오래 훔쳐본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걸음걸이를 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하루를 보아야 한다. 나는 아빠의 걸음걸이를 본다는 명목으로 아빠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물론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아빠는 오늘 하루 종일 바빴기 때문이다. 초새벽에 일어나 배를 끌고 나가서, 다시 돌아온 뒤에 커피 한 잔 겨우 마시고 또 바다로 나간다. 오전 내내 그 일을 반복하다가, 오후에 잠깐 틈이 나면 못 잔 잠을 자느라 바쁘다. 그마저도 20분 정도밖에 안 된다. 다시 또 바다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저녁이 다 지난 후, 그러니까 아빠의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에야 아빠의 걸음걸이를 탐구할 수 있었다.


    아빠는 힘을 주고 걷지 않는다. 터덜터덜, 힘을 쭉 빼고, 어깨도 잔뜩 늘어트린다. 배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긴 아빠의 삶이 그 걸음에 묻어있다. 배 안에서, 아빠는 파도 따라 너울 따라 움직이는 몸을 고정시키려 온 몸에 힘을 주고 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바다 위에서 그 어깨는 항상 긴장으로 굳어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지상에 내딛는 걸음은 조금 힘이 없고, 어깨도 다소 풀어져있는 것이다. 바다로부터 벗어난 그 순간만큼은.


    또 아빠는 상체를 조금 뒤로 빼고 걷는다. 허리가 아프기 때문이다. 종종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거나 짝다리를 짚는 것도 아마 그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아빠의 하루 중에는 아픈 허리를 붙잡고서라도 뻣뻣하게 서있어야 하는 시간이 있다. 저녁 시간, 아빠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손님들과 다음날 새벽 스케줄을 조정하고 그들의 밑밥을 개주느라 바쁘다. 그 잠깐잠깐 사이에 아빠는 허리를 쭉 펴고, 상체를 뒤로 뺀다. 그리고 한숨을 크게 내쉰다. 나는 아빠의 걸음걸이를 보면서, 아빠의 지친 표정도 함께 본다.


    마지막으로 아빠는 외롭게 걷는다. 일이 생겼을 때는 남들보다 급하게 걷고, 조금 여유로울 때는 남들보다 천천히 걷는다. 그래서 아빠 곁에는 나란히 걷는 사람이 없다. 유난히 손님이 많은 연휴, 바다로 나서는 아빠의 걸음, 철수를 마치고 집에 들어서는 아빠의 걸음, 담배를 피우러 문밖을 나서는 아빠의 걸음에는 어떤 외로움이, 쓸쓸함이 묻어났다.


    나는 아빠의 걸음걸이를 보면서, 그 겉은 나와 닮았을지라도 속은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닮지 못한다고. 그 세월과 삶의 무게를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빠의 걸음을 보는 이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마음만 먹으면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지금이, 걸음걸이를 보며 그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순간이, 그렇게 우리를 향한 오랜 고생과 사랑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오늘이 있다는 게, 너무도 감사하다고.


    아빠와 함께 오래 걷고 싶다. 어설프게나마 그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빠르고 느린 그의 속도를 내가 더 맞춰가며, 함께 오래오래 가고 싶다. 걸어가는 길 내내 나는 아빠가 심심하지 않게 쫑알쫑알 떠들기도, 실없는 농담을 던지기도 할 것이다. 꽃이 핀 길가에서는 그의 사진을 찍어주고, 시원한 그늘에서는 같이 앉아 그의 옛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다.


    걸어가는 동안 내가 지치거나, 더 가는 것을 포기하거나, 길을 헤매고 있으면 아빠는 등을 내어주고, 길을 알려주고, 묵묵히 말해줄 것이다. 아빠가 있으니까 괜찮다고 말이다. 언젠가는, 그 반대의 경우가 생길 날이 오겠지. 나는 그날을 기다리며 그렇게 나란히 걸어갈 것이다. 그때의 아빠의 걸음이 외롭지 않게. 또 무겁지 않게. 아빠 곁에는 걸음걸이마저 닮은 국화빵 딸내미가 항상 있다고, 그렇게 이야기해주기 위해.





    이 글을 보고 계실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 건강하게, 저랑 오래오래 함께 걸어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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