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기억도 안 나는 한참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이사를 해본 적이 없어. 중학교 때 서울로 올라오긴 했지만 이사라기보다는 내 한 몸만 친척집으로 옮겨오는 거였지. 그래서일까? 나는 항상 이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괜히 마음이 설레는 것 같아. 왜, 그런 거 있잖아. 이삿날에는 짜장면을 시켜먹거나 하는 그런 일들, 난 그런 것조차 하나의 낭만처럼 느껴졌어. 물놀이를 마치고 먹는 컵라면처럼 왠지 그런 순간에 먹는 짜장면은 더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고.
네가 이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 설렘에 더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 너는 학교 기숙사에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은 자취를 시작한다 했지. 사실 그때도 속으로 조금 감탄했던 것 같아. 주변에 자취를 하는 친구들이 몇 없어서 그런가, '자취러' 하면 막 대단해 보이고 그런 거 있지. 그러더니 또 어느 날은 동생과 함께 지낸다며 새로운 곳으로 보금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또 한참을 보내다 이번에는 우리 동네 옆으로 이사를 온다는 거야. 신기했지. 어느덧 이번이 너의 세 번째 이사라는 것이, 그 모든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리 함께 했다는 것이, 그 시간만큼이나 훌쩍 자란 네가, 이제는 집을 스스로 알아보면서 찾아다니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
이사는 할 게 못 된다는 너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 한쪽에는 정리하지 못한 이삿짐을 잔뜩 쌓아두고, 누울 공간만 겨우 마련해 널브러져 있을 모습이 상상 됐거든. 피곤해 죽을 것 같은 와중에 이사 잘했냐는 카톡을 무시할 수 없어서 기진맥진한 채로 답장했을 것도 눈에 선하고. 정신없이 지나갔을 너의 하루가 짐작이 됐어. 맞아. 이렇게 힘든 일이지. 이사라는 게.
적당한 위치, 적당한 평수, 적당한 채광과 적당한 구조를 갖춘 곳을 찾아야 해. 또 마음에 든다고 덜컥 계약을 할 수는 없잖아. 우리는 사회초년생이니까, 여유가 되는 선에서 해결하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 하지. 그 과정부터 얼마나 지치는 일이겠어. 결국 몸 하나 누일 곳, 마음 편하게 쉴 곳 하나 찾는 일인 건데 수많은 현실과 타협하는 일까지 해야 한다는 게. 그래도 그 시간을 거쳐 너를 위한 공간을 만나 다행이야.
이사 장소가 결정이 되면, 이제 슬슬 짐을 싸겠지? 익숙해진 것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면서 가져갈 것과 버릴 것을 나눠야 해. 이때는 쓸모에 대해서 고민하게 돼. 내가 이걸 그곳에서도 쓸까? 꼭 필요한 것일까? 공간을 너무 차지하면 어쩌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가져가면 힘만 드니까, 여태껏 쌓아뒀던 것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생각해볼 시간을 가져야 되는 거야. 그 분류 작업도 길고 지루하지. 깨질 것들은 조심조심 싸야 하고, 작아서 잃어버릴 것 같은 것들은 특별히 더 잘 담아둬야 하고.
이삿날에는 그 모든 것들을 옮기느라 온 힘이 다 빠질 거야. 혹시 놓고 오는 건 없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고, 도착한 집의 문을 닫고 돌아서면 잔뜩 쌓인 이삿짐들이 눈에 들어오고. 언제 이걸 다 정리하나 심란하고, 귀찮은 마음도 들고 그렇겠지. 아마 며칠 동안은, 매일 바닥을 쓸고 닦으며 청소를 하고 짐을 정리하다가 지쳐 잠들겠지. 이사는 이래서 할 게 못 되는 일인 것 같아, 꼭 네 말처럼.
그래도 말이야. 나는 언젠가 매일이 무기력하다고 말했던 너에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건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어. 이사할 집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네가 포기할 수 없었던 게 하나쯤 있지 않았어? 있지, 나는 그게 너 자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수많은 조건을 고려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도, 네 몸이 편한 곳, 마음이 편한 곳이라는 조건 하나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으면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그리고 알아채길 바랐어. 네가 너 스스로의 자리를 결정할 만큼 훌쩍 성장했다는 걸, 이렇게 발품을 파는 것도 결국 너를 위한 것이며, 그만큼 너는 널 여전히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는 걸. 그 힘겨움 속에서도 눈치채길.
짐을 싸는 과정에서도 소득이 있었지. 공간만 차지했던 의미 없는 소품들, 이제는 안 입게 된 옷들, 오래되어 버려야만 하는 것들을 처분할 기회가 온 거야. 번잡한 것들은 다 버려두고, 이제 너에게 꼭 필요한 것들만 너의 짐으로 이고 간다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지 않을까? 나는 네 공간의 짐을 비워내는 과정에서, 꼭 마음의 짐도 그렇게 버려두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때 탄 마음, 먼지가 쌓인 마음 모두를 그 집에 놓고서 나오라고. 네 어깨가 무겁지 않기를 바라니까.
새로운 집에서 이삿짐을 정리하다 보면 곧 물건들이 가장 적당한 위치로 옮겨지겠지. 네가 잘 찾아볼 수 있는 곳에,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용도가 정해진 곳에 그렇게 제자리를 찾아갈 거야. 물건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네 마음도 그렇게 정리가 된다면 좋겠어. 기쁨과 행복 같은 것들은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고, 가끔 찾게 될까 봐 가져온 슬픔이나 후회 같은 것들은 상자에 고이 넣어 안 보이는 곳에 정리해두고. 앞으로 너에게 필요한 용기나 자신감 같은 것들은 깨끗한 수건을 욕실에 쌓아두는 것처럼 네 방 한편에 쌓아두자. 그럼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으니까.
지금 당장 몸은 피곤하고 고되겠지만, 조금만 더 애쓰면 너만의 공간에서 푹 쉴 수 있을 거야. 새로운 공간을 직접 가보진 못했지만 왠지 나는 어떻게 꾸며질지 알 것만 같아. 가영이답게, 가영이다운 공간으로 채워나가겠지. 너를 닮아 부드럽고 따뜻한 집. 들어서는 순간 다정한 기운이 막 쏟아지는 그런 집.
이사를 축하해, 가영아. 언젠가 집이 허전하게 느껴질 때면 꼭 나를 초대해줘. 두 팔 가득 사랑을 안고 갈게. 너에게 줄 넘치는 마음을 안고, 그렇게 찾아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