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우유에 진심인 편
나를 향한 당신의 마음에도, 진심인 편
"설마 이거 혼자 다 마신 거야?"
분리수거를 위해 모아둔 빈 우유갑들을 보고, 언니가 입을 쩍 벌린다. 엉. 어제부터 오늘까지 마신 거야. 짐짓 뿌듯한 어투로 이야기하면 질린 듯한 눈빛이 되돌아온다. 그믄 즘 므셔르, 진쯔…. 앙 다문 입새로 나오는 잔소리는 덤. 나는 부러 울적한 말투로 이야기한다.
"이게 내 주식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건 그냥 굶으란 소리랑 같아."
과장된 표정연기까지 곁들이면, 언니는 답하길 포기하고 고개를 젓는다. 그럼 나는 또 낄낄거리면서 웃는다. 세상에서 언니 놀리기가 제일 재밌는 사람처럼.
커피우유가 주식이라는 말은 꼭 과장이 아닌 게, 나는 실제로 커피우유를 끼니마다 챙겨 먹는다. 밥을 먹었으면 간식으로, 안 먹었으면 식사 대용으로. '커피'가 아니라 '커피우유'라고 꼭 집어 이야기하는 이유는 카페 등에서 내려마시는 커피 음료가 아니라 편의점 같은 곳에서 파는 '커피우유'를 특히 선호하기 때문이다.
커피우유에 대한 사랑은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 학교 매점을 들락날락하는 대신, 매일 아침 편의점에 들렀다. 그곳에서 300ml짜리 커피우유를 세 개씩 샀다. 아침 자습용, 점심 자습용, 야간 자율학습용 이렇게 세 개. 학교에 도착하면 책상에 세 개를 줄지어놓고 때마다 우유를 마셨다. 당시 커피우유를 고집하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는데 첫째는 카페인으로 잠을 깨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공부 중 찾아오는 허기를 달래기 위함, 셋째는 쓴 커피 대신 내 입에 딱 맞는 맛있는 음료를 마시기 위함이었다. 마셔서 얻는 즐거움만큼 굳이 따라오지 않아도 될 것들이 결과로 따라오기도 했다. 입학 때보다 7kg나 불어버린 몸 같은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대학교를 졸업한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니 '참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할 수 있다. 스스로 용돈을 벌기 시작한 스무 살 무렵부터는 카페도 즐겨 다니긴 했으나 커피에 딱히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오히려 가면 마실 게 없다는 게 고민거리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럼 습관처럼 다시 편의점에 들어가 커피우유를 싹쓸이 해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나의 이 지독한 고집과 취향에 혀를 내둘렀다.
커피우유와 잠시 거리를 두었던 시기도 있었다. 어느 날 병원에서 위내시경을 통해 역류성 식도염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진단을 받은 다음, 강제로 커피우유와의 이별을 경험했다. 약을 먹던 두 달가량이 내게는 나름 고통의 시간이었다. 물보다 자주 마시던 걸 못 마시게 된 설움이 어찌나 크던지. 주변 지인들은 이참에 커피우유를 끊으라고 말했지만 나는 오히려 하루빨리 이 병을 물리쳐서 커피우유를 다시 만나리라, 생각했다.
당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있다. 하루는 늘 가던 편의점에 들어가 음료 하나를 계산대에 놓았다. 커피우유 매대 앞에 서서 한참 고민을 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보리차 하나를 사던 참이었다. 계산을 하려는데 갑자기 카운터에 계시던 사장님이 내게 말을 거셨다. 오늘은 커피우유 안 마시고 이거 마시네?
낯가림으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인물이 나인지라, 대뜸 걸린 낯선 이의 질문에 잠깐 삐그덕 댔다. 얼마나 자주 사마셨으면 그걸 기억하실까 싶은 마음에 좀 민망하기도 했다. 나는 어정쩡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약을 먹고 있어서요….
사장님은 내 말에 눈썹을 잔뜩 내리면서, 어이구, 어디가 아파요? 하고 물으셨다. 나는 또 어색하게 답했다.
"병원에서 식도염이라고 하더라고요…."
매일 와서 먹던 것도 못 먹고 속상하겠네. 사장님은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말과 함께 보리차를 건네주셨다. 나는 평소처럼 작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며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거리두기 기간을 가진 노력 끝에, 두 달만에 병원에서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는 판정을 받았다. 나는 그날 씩씩하게 편의점에 들어가 커피우유를 고르고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사장님은 허허허, 웃으면서 물으셨다. 이제는 약 안 먹느냐고. 나는 같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이젠 안 아파서 먹어도 된다고 답했다. 사장님은 축하한다면서 내가 고르지 않은 작은 사탕 한 개를 같이 건네주셨다.
이후로 나는 사장님과 가끔씩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물론 어른에 대한 낯가림은 여전한지라, 주로 질문은 사장님이 하시고 나는 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말이다. 겨울에 머리를 덜 말리고 오면 춥지 않냐며 감기 조심하라 일러주고, 새로운 커피우유 제품이 나왔는데 한 번 마셔보겠냐며 건네주기도, 그 다음 내가 늘 먹던 것을 멋쩍게 다시 고르면 전에 준 게 맛이 없었냐고 물으며 같이 웃기도 했다. 우리 사이에는 늘 커피우유 하나가 놓여있었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그것을 계산하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따뜻하고 다정한 이야기를 옮기기에는 충분했다.
생각해보면 커피우유에는, 그것에 대한 내 사랑뿐만 아니라, 나를 향한 다른 사람의 마음도 묻어있었다. 매일 같이 잔소리를 하면서도 커피우유 사다 주면 안 되냐는 말에는 군소리 없이 사다 주는 우리 언니, 용건 없이는 연락도 안 하는 동생이지만 '오는 길에 커피우유 좀'하면 세 개씩 사다 주는 오빠 하나, 뭐 사러 나가는 길에는 항상 '커피우유 사다 줘?'하고 먼저 물어보는 오빠 둘. 커피우유 마시고 싶다는 내 말에 피곤한 와중에도 항상 차를 끌고 편의점까지 같이 가주는 엄마. 힘든 내색을 하면 기운 내라며 내가 좋아하는 커피우유 기프티콘을 보내주는 내 친구들. 와중에 항상 마시던 300ml가 안 보인다며 200ml를 보내주는 걸 아쉬워하는 마음들. 그 모든 다정함이 우유 속에 달콤하게 녹아있어서, 나는 커피우유를 더 끊지 못하는 게 아닐까.
나는 커피우유에 진심인 편이다. 몽롱한 정신을 쏙 잡아가 잠을 깨워주는 것도 좋고, 허기를 부담스럽지 않게 채워주는 것도 좋고, 달콤한 맛과 진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 것도 좋다. 마찬가지로 나를 아껴주는 당신들에게, 진심이다. 꼭 커피우유처럼 내 마음을 두드려주는 당신, 마음의 허기를 따뜻하게 채워주는 당신, 입안 가득 달콤함을 남겨주는 당신. 그런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