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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휘 Apr 21. 2016

젊은 비평은 가능할까

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4년 전, 제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대구 교보문고에서 빼들었다. 잡으면 손에 착감기는 크기에 밝은 분홍색과 청록색이 뒤섞인 배합 덕분이었다. 뒤집어서 가격을 확인했다. 5500원. 나는 부담 없이 사서,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KTX에서 차례로 읽었다. 그 해의 대상 수상작 가는 손보미였고, 다른 작품들도 훌륭했다. 내가 알던 소설보다 조금 더 가볍고 조금 더 전위적이었다. 나에게는 적당한 온도로 데워진 온수로 가득 찬 탕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이토록 만족스러운 구입 및 독서 경험을 주는 책은 오랜만이었다. 그 후로 매년 이맘때면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기다렸다. 그리고 제7회 작품집이 며칠 전에 나왔다.


4회와 5회에 수록된 작품들은 훌륭했다. 하지만 수상작품집으로 놓고 볼 때는 약간 고루해 보였다. 좀 더 전위적이고 좀 더 젊은 감각의 소설이 실렸어도 되어 보였는데, 보수적인 선택이었다. 6회에는 정지돈이 수상했는데, 갸우뚱했다. 그해에는 유달리 어떤 한 인물을 전기적으로 풀어내는 소설이 주목받았는데, 정지돈의 수상작도 그랬다. 이것만으로 비판받기는 그렇고 그 소설도 괜찮았다. 그러나 정지돈 소설 중에 최고였느냐? 생각해보면 아니었다. 또 등단 후 10년 이하의 작가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이 사람이 여기 낄필요가 있나 싶은 작품들도 많았다. 이장욱과 황정은이라니. 5년으로 줄이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난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 매력을 잃어갔다.


요즘은 뜸하지만 계간지에서 신인들을 뽑는 공모전과 신춘문예의 심사평을 꼬박 읽었다. 문학동네, 창비, 자음과 모음, 문학과 사회, 세계의 문학, 문예중앙, 한국일보, 조선일보, 한겨레, 경향신문, 서울신문, 동아일보 정도는 챙겼다. 신춘문예와 문예지의 결이 미묘하게 다른데, 문예지는 신춘문예보다 작품에 드러난 작가의 매력에도 중점을 둔다. 이 차이는 크지는 않다. 문예지가 자신의 지면을 몇 번 더 내준다는 면에서 당연히 문예지의 공모전이 더 나은 등단 통로지만 이 둘이 추구하는 바는 다르지 않다. 늘 이런 말을 한다.


문단에 충격을 안겨주는 젊은 감각의 소설과 작가를 기다린다.      


올해 작품집을 습관처럼 샀지만, 내심 기대했다. 예전보다 흥미를 잃었다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독서경험을 줬기 때문이다. 그래도 판형이나 가격 때문인지 현대문학상 작품집이나, 이상문학상 작품집보다 여전히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수상작 '너무 한낮의 연애'는 전통적인 소설이었다. 실제로 있었던, 상대를 지긋이 말없이 바라보다 떠나는 퍼포먼스를 모티프와 장치로 배치하고 예전에 만났다 헤어진 연인을 주인공인 '필용'이 만나는 이야기를 배치했다. 사실 신선하진 않았는데, 이내 신선함과 기발함이 소설에서 그렇게 중요하진 않으니까 하고 넘어갔다. 재미도 있었고, 괜찮은 작품이었으나 이것이 뛰어난 작품인지는 모르겠다. 난 오한기의 <새해>가 더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작품집은 수상작들이 수록되고 뒤이어 작가노트가, 또 뒤이어 젊은 평론가의 평이 실리는 구조로 편집되어있다. 이번에 읽으면서는 예전과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젊은 비평'은 가능할까. 비평이 어떤 작품을 들여다보고 발견해주는 일이라면 '새로운' 비평은 가능할까.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젊은 비평가들의 비평에 실망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끝까지 혹은 충분히 들어가서 읽어주는구나 느껴진 평은 두개 정도였다. 그리고 새롭거나 참신하다 느껴지는 비평은 없었다. '젊은 소설과 젊은 작가'는 이야기하면서 왜 '젊은 비평'은 그에 비해 더 적게 이야기되고 있을까.


몇 년 전, 문예지의 주요 화두는 '비평의 죽음'이었다. 비평의 죽음이라는 주제가 죽었는지 혹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비평을 읽지 않는 시대에 '젊은 비평'을 원하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다. 그래도 죽은 것은 '기존의 평론과 비평'이지 비평 자체가 죽은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다.


비평이라는 작업이 어떤 이론에 어떤 사유에 기대 대상을 바라보고, 또 이해하고 그 이해를 공유하는 일이라면 애초에 '새로운 비평'을 기대하는 것은, 데리다나 라캉, 모리스 블랑쇼, 레비나스, 가다머 급의 사상가가 등장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생각도 든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등단한 직후의, <몰락의 에티카> 즈음의 신형철은 '젊은 비평'을 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궁금해진다.) 형식적 새로움은 진정한 새로움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형식적 새로움이 새로움이 되려면 논의와 시간을 견뎌야 한다. 결국 형식적 새로움도 사상적 새로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의 결을 따라가자면, '새로운 비평', '젊은 비평'은 '젊은 평론가'에게는 버겁고, '성숙한 사상가'에게서 드물게 나올 거다.


생각해보니, 새로워야 하냐 싶다. 더 넓게 그리고 훌륭하게 이어가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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