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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휘 Mar 12. 2017

우울과 죽음

우울과 죽음

-조너선 트럼블



우울하다, 라고 입으로 소리 내어서 얘기 하기 전까지 목에서 몇번이나 그 문장이 올라왔다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우울하다라는 혼잣말이 얼마나 많이 모여서 당신에게 하는 말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우울하다. 때때로 우울하다. 때때로는 변덕의 의미가 아니다. 우울은 변덕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원인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 어떤 표면적인 원인도 찾을 수 없을 때 나는 우울하다. 그 어떤 사건에도, 일에도, 나의 어떠함에도 핑계를 둘 수 없을 때야 확진되는 증상.


나는 정신과학이나 임상심리에서 말하는 우울의 진단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읽어본 적이 있었을 뿐. 전문가들의 판단과정이나 진단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 그래서 불안하다. 그들 앞에 앉아서 '당신은 우울증이 아니에요.' 라는 말을 들을까 불안하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지 못한다. 나는 우울하다.


사실 예전에 나는 우울하다고, 정신과 전문의는 아닌 의사 지인에게 전화한 적이 있다. 그는 여러 말을 해줬지만, '자살시도가 몇번 있었어야. 의학적인 우울이야.'라고 얘기 했다. 걱정하지마라. 그정도는 아니야. 그 말을 듣고 나는 우울했다. 나는 우울도 하찮다. 그래서 난 그들에게 가지 못한다.


우울증을 겪었단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아니 함께 지내던 이가 일을 쉬는 이유가, 우울증 때문이라고 하는 상급자를 본 적이 있다. 다른 사람의 병을 말하는 상급자를 탓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랬구나. 라는 사람이 있었다. 있었다.


우울한 사람에게는 냄새가 난다. 체취가 아니라 눈빛과 말투, 팔 다리의 움직임에서 나오는 분위기. 우울한 사람은 자기 우울에 민감한 사람이므로 안다. 자신의 냄새를. 그래서 필사적으로 냄새를 덮으려 노력한다. 냄새가 나는 사람은 늘 혼자니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더이상 고립될 수 없으니까. 자신의 심연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데 외부로 부터도 유리될 수 없으니까. 필사적이다. 우울은 무거워서 필사적으로 허우적 거려도 그 자리다. 그것도 잠시. 허우적 대면서 우리는 파국을 예감한다.


우울하다는 말은 가장 나중에 나오는 말일 수도 있겠다. 자신의 내면을 끝끝내 객관화해서 들여다 본 후에야 할 수 있는 말. 우울하다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가.


죽고싶다. 삶은 길다. 길어. 마흔이면 죽던 때가 있었다던데. 죽고싶다. 되뇌인다. 되뇌인다.


'자살 시도가 몇번 있었어야.'


어쩌면 난 여러번 시도 했을지 모르겠다. 늘 실패 했고. 내 죽음 이후를 걱정하는 실수를 해서.


그러면 나는 전문가들 앞에서도 우울증일 수 있겠다.


공인된 우울증은 더 가벼우려나 더 무거우려나. 같겠지. 아님 비슷하겠지. 그렇겠지.


죽음은 너무 번거롭다. 가까스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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