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박열 >
영화 <박열>을 봤다. 영화 박열은 동명의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이다. 박열은 일제시대 일본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였고 민족주의자였다. 아나키즘 즉 무정부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할 수 있나 의문이 들지만 그는 그랬던 것처럼 보인다. 일본의 아나키즘의 천황제와 제국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활동이 이루어졌고 천황제와 일본 제국주의를 타파하는 것은 조선의 민족주의 관점에서도 타당한 일이었으니까. 박열은 1902년에 문경에서 태어나 1923년에 일본 감옥에 수감된다. 히로히토 황태자를 죽이려 했다는 죄목이었다. 대역 사건이었다.
영화로 다시 돌아가자 20세기 초의 일본은 여러모로 복잡하다. 한국을 치고 그곳을 기반 삼아 서양처럼 제국으로 발돋움해야 한다는 이들도 있었고, 무정부주의자들과 맑시즘을 추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천황제 타파를 주장했는데 실제로 총격과 폭탄 투척 계획을 짜기도 했다. 그들은 다른 아시아의 민중들에게도 우호적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 많은 국력을 소비하고 또 승리하고도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고 이는 일본인들에게 큰 불만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일 제국주의자들에게는 위협이었다.
일제 시대를 다룬 대중 영화들은 이제껏 일본을 단순하게 그렸다. 일본에서 건너온 군인들, 총독, 총독부 직원들, 그리고 그들의 앞잡이는 잔인하고 가차 없었다. 이따금 독립투사들을 돕는 일본인들도 있었지만 늘 일본에서 이탈한 개인이었다. 이것은 선과 악의 구도를 선명하게 만들고 그 선명해진 구도 하에 권선징악의 결말을 더 짜릿하게 만드는 장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납작해진 불의의 시대를 사는 등장인물들은 입체적일 수 없게 되고 결국 권선징악에 희생된다. 그들은 이야기에서 주어진 역할만하다 사라진다. 그리고 관객들은 지루해지고, 혹은 몰입하지 못하게 된다.
영화 <박열>은 이 부분에서 일정 정도 성공한다. 한국이 아닌 일본이 배경인 이야기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본의 모습이 더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관동 대지진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사람들이 우물에 독을 타고 불을 지른다는 소문을 내는 사람들은 분명 악마적이나 그 악함을 두렵게만 그리는 게 아니라 우습게도 그린다. 일본의 내각은 어딘가 우스꽝스럽다. 과장된 몸짓과 말투로 몇 안 되는 귀족이 자리를 돌려가며 맡는 우스운 제국이다. 이는 조선사람들이 학살당한 비극을 슬픈 일로만 관객이 소비하지 않고 일본 내각을 조롱할 수 있게 해준다. 얼마나 어설프고 못난 권세인가. 다른 일본인들도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투옥되었을 때 그들을 돕는 일본인 아나키스트와 지식인들은 국적을 떠나 그들의 사상과 천황제에 반대하는 동지로서 연대한다. 여러 인물들을 보여주고 거론하면서 이들이 이탈한 개별적인 탈주병들이 아니라 일본 사회에 지분을 가진 목소리였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심문하던 검사, 박열과 후미코를 감시하던 교도관이 보여주는 태도는 이것이 그저 일본과의 투쟁이 아니라 천황제-제국주의와 투쟁임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일본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면서도 그 시절의 일본을 정확히 묘사해내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몇 가지 단점도 있다. 우선 음악을 너무 직설적으로 사용한다. 박열과 그 동료들의 유쾌함과 그리고 이야기의 비극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이 영화의 과제였는데 음악이 유쾌함과 비극성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느낌이었다. 유쾨함과 비극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고 서로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유쾌했다 갑자기 비극성을 드러내는 음악이 흐르는 식이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후반부에 가네코 후미코가 나오지 않는 부분부터 긴장감이 떨어진다. 이야기의 생기를 불러일으킨 건 박열의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가네코 후미코였다. 일본인으로 태어나 부모로 버림받아 한국에서 자라고 아나키스트가 되어 조선인 애인과 대역죄로 감옥에 갇히는 입체적이고 문제적인 캐릭터는 박열의 존재보다 더 흥미롭다. 그렇다고 이 여성 캐릭터가 안 보이면 이야기가 급속하게 식게 둬서는 안 되었다. 이건 아쉬운 부분이다.
결론. 영화 <박열>은 준수한 대중 영화다.
추가로 바람이 있다면 가네코 후미코를 중심으로 한 영화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