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2022년│Episode 31│2022.03.02
결혼을 결심하고 신혼집을 구하면서 이 동네에 처음 오게 됐다. 지금에야 이 동네 특유의 소박함과 따스함에 익숙해졌지만 사실 처음 이 동네를 알게 됐을 때 조금 놀랐다. 신도시와 정돈된 구역 내에 살다가 온 이 동네는 솔직히 말하자면 굉장히 낡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삼십 년 가까이 살면서 은평구 자체에 올 일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연신내에 살고 있는 친구네 놀러 오느라 한 번, 북한산 초입에서 백숙집을 하는 친구네에서 영화를 촬영하느라 한 번이 기억 속 전부였다. 그냥 이 동네 자체가 내게 너무 낯설었다.
하지만 정돈되지 않고, 어수선한 느낌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부분은 오래된 도시 내 마을 특유의 따스함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평생 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정 불편하면 2년 뒤 이사 가면 될 일이었다. 다만 나의 가장 큰 걱정은 딱 한 가지였다.
"자기. 이 동네에는 빵집이 없어.."
"... 응?"
빵집이 없다는 것은 내게 정말 큰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맛있는 빵집이 가득한 연남동, 연희동, 망원동, 합정동이 차로 15분이니 원하면 언제든 금방 갈 수 있다, 내가 원하면 밤이고 낮이고 언제든 달려갈 것이다 등등의 말로 나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의 이런 고민은 정말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부모님도, 선배들도, 친구들도 철없는 소리 한다며 집 구하는 것에 정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시간 뺏기지 말고 어쨌든 아파트 전세로 시작하는 것에 감사나 하라고 했다. 나는 조금 억울했다. 빵집이 없어서 여기에 안 살 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만큼 빵집은 나에게 큰 문제라는 것일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 전 부모님과 살던 곳에는 걸어서 5분 내 빵집이 다섯 개가 있었다. 김영모과자점, 파리크라상, 아티제, 타르틴 베이커리, 그리고 지금 없어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에끌레어가 맛있었던 곳까지. 걸어서 15분으로 반경을 넓히면 셀 수 없을 정도다. 빵을 무척 좋아하는 내가 이런 빵세권에 산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단순히 빵을 먹는 행위를 넘어서 매일 새로 나온 빵을 구경하고, 그날의 기분에 맞춰 어울리는 빵을 찾고, 분주하게 빵을 사러 오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매일 조금씩 다른 시도를 해 보는, 그런 어떤 하나의 취미활동이었다.
그런 내게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동네에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빵집이 없다는 것은 꽤나 큰 걱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보니 일단 주말에 집에 있을 시간 자체가 별로 없었다. 주말마다 일은 꼭 생겼고, 일이 없을 때는 부모님 집에 자주 갔다. 그리고 퇴근 후 빵이 먹고 싶을 때는 회사 근처 빵집을 이용했다. 우려했던 것보다는 훨씬 아무 일 없게 잘 지냈다. 마음 한편 계속 알 수 없는 헛헛함이 있었지만, 다른 즐거움에 묻혀 잊혔다.
어쨌든 빵집이 없어 나를 당황하게 만든 이 동네에 산지도 벌써 3년이 넘었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동네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꽤나 맛있고 꽤나 힙한 카페가 생겼다. 작년 여름 아주 뜨거울 때 생겼다. 어느 여름날 더위에 지쳐 집에 걸어오는 길에 처음 발견하고 그 길로 들어가서 드립 아이스를 한 잔 마셨다. 더위로 인한 두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온몸에 힘이 솟았다. 커피도 맛있었지만, 바깥이 훤히 보이는 통창과 나무 의자가 참 예뻤다. 우리 동네에도 드디어 종종 올만한 카페가 생겼구나. 참 좋았다. 그리고 그 카페를 중심으로 귀여운 밥집이 앞 뒤로 두 개 생겼었다. 혹시 우리 동네가 망원동처럼 되는 것인가 하고 잠깐 기대했는데, 안타깝게도 두 개의 식당 모두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없어졌다. 그리고 한동안 오래된 상가마다 편의점과 아이스크림 할인점이 생겨서 아쉬웠다. 물론 필요한 것들이지만, 저렇게 골목마다 있기에는 장사도 안될 것 같고, 또 밤이고 낮이고 새하얀 빛을 뿜어내는 모습이 약간 피곤하기도 했다.
그리고 작년 말까지. 내 기대와는 달리 큰 변화는 없었다. 그런데 올해가 되고, 꽃망울 터지듯 동네 이곳저곳 공사의 바람이 불었다. 한동안 큰 천막으로 덮여있어 무엇인지 모른 채 그저 빵집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난주 밤 산책 때 보니 두 개는 카페, 한 개는 미술학원이었다. 아직 두 개는 모르겠다.
매일 저녁 산책을 핑계로 그곳들을 차례로 보고 온다. 오늘도 보고 왔다. 5개를 모두 둘러보고 오려면 약 35분이 걸린다. 산책 시간으로도 딱이다. 내 가게도 아니고 큰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매일매일 아주 조금씩 변해가는 그곳들을 보는 것이 정말 좋다. 카페가 열면, 미술학원이 열면 얼른 빨리 그 누구보다 먼저 가야겠다. 누군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사장님들은 아실까.
아직 생기지도 않은 카페 때문에, 미술학원 때문에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이렇게 또 좋아지다니. 내가 봐도 나를 참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우리 동네 곳곳을 기록해보고 싶다.
※ 제목 속 사진은 현재 공사 중인 곳으로 2층은 주인 거주 1층은 카페로 변할 예정이라고 한다. 건물도 예쁘고, 변해가는 모습도 예뻐서 가장 기대되는 곳이다. 변하기 전 모습을 남겨두고 싶어 로드 뷰를 캡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