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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기 Mar 09. 2022

홍게를 먹는다. 홍홍홍

기록하는 2022년│Episode 37│2022.03.08

바로 어제 야식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건강한 식사를 목표로 한다고 구구 절절 일기에 써놓고 이렇게 바로 다음날 이 정도로 과한 저녁을 먹는다는 것이 어딘가 모르게 조금 창피하다. 

하지만 늦은 시간에 먹은 것은 아니고, 배달 음식도 아니었고, 또 게는 몸에 나쁘지 않은 음식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먹어도 괜찮을 이유는 많다. 역시 나는 나에게 굉장히 관대하다. 이 역시 창피한 부분이다.


갑자기 홍게를 왜 먹게 된 것이냐. 지난 주말 동네 산책을 하다가 새로 생긴 홍게 집을 발견했다. 늦은 시간이었는데 그 가게만 불이 환했다. 수조 한가득 차있는 홍게와 고소한 게 찌는 냄새에 마음을 빼앗겼다. 바로 먹고 싶었지만 잘 이겨내고 조만간의 좋은 날을 기약했다. 그리고 그 조만간이 바로 오늘이다. 내일은 선거일이라 출근하지 않으니 오늘 밤은 길다. 그리고 남편은 오늘 마감을 끝냈다. (물론 나는 아직 안 끝났다. 휴. 마감 생각을 하니 갑자기 또 걱정이다.) 이보다 좋은 날이 또 있을까. 역시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한 이유는 수백 가지도 만들어낼 수 있다. 기분이 좋을 때는 기분이 좋아서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에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한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축하해야 하고,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힘을 내야 한다.


어쨌든 홍게를 먹기로 결정하고 전화로 포장 주문을 예약했다. 게를 찾으러 가는 길은 발걸음도 가볍다.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따뜻하다. 게 먹기 딱 좋은 날이다. 가게에 도착하니 이미 포장 완료다. 직접 찾으러 왔다고 3,000원 할인과 함께 라면 세트(라면용 홍게 + 열라면)를 서비스로 받았다. 가능하다면 배달을 줄여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다. 배달을 시켰다면 배달비가 3,000원이었을 테니 일단 6,000원을 아꼈다. 그리고 음식을 찾으러 오고 가는 동안 아주 조금의 걷기 운동도 할 수 있다. 또 깨끗한 가게 내부와 친절한 사장님을 직접 뵈니 괜히 반갑고, 게도 더 맛있을 것만 같다.


집에 와서 포장을 뜯는다. 별도의 손질은 없다. 생각했던 것보다 양도 많다. 

사실 주문할 때는 대게나 킹크랩이 아닌 홍게라서 먹을 것이 있을까, 살수율이 괜찮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막상 받아보고 뜯어보니 오히려 다 먹을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다. 게마다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다리 살도 제법 있는 편이다. 당연히 다 먹겠지만 혹시라도 다 못 먹으면 게 살을 발라내서 내일 게살 파스타를 해 먹어야지. 남편과 식탁에 앉아 본격적으로 게를 발려 먹기 시작한다.


그나저나 요즘 남편과 노는 게 제일 재미있다. 연애 때도 남편과 노는 것이 제일 재미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내 생활도 재미있었었고, 내 친구들도 재미있었고, 나 혼자만의 시간도 재미있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 남편과 노는 것이 유독 더 재미있다. 남편과 함께 하는 것이 결혼 전보다 당연해지고, 코로나로 친구들도 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하다 보니 남편과의 시간에 더 익숙해지고 편안해진 것 같다. 특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남편과 수다 떨고, 뒹굴 거리는 것이 정말 즐겁다. 그래서인지 요새 사회성이 예전에 비해 조금 떨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된다. 내 생활 없이 무조건 남편에게 의존하게 될 것이 걱정인 것이 아니다. 그렇지는 않다. 그냥 뭐랄까. 어쨌든 나와 가장 잘 맞고, 나를 가장 이해해주고, 나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시간을 오래 보내다 보면 그런 관계가 당연해지고, 세상을 너무 긍정적으로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걱정이 된다. 이게 무슨 걱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내 사회성이 조금 걱정되지만, 어쨌든 남편과 노는 게 제일 재미있다는 것이다.


남편과 신나게 수다 떨다 보니 벌써 거의 다 먹었다. 다 먹을 수 있을지를 걱정했던 것이 민망할 정도다.

연애 전 남편은 게나 새우처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너무 번잡스러워서 별로라고 했었는데, 해산물을 워낙 좋아하는 나를 만나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하다 보니 어느새 나만큼 해산물을 좋아하게 됐다. 번잡스럽다고 했던 그 사람은 어디 갔는지, 옆에서 부산스럽게 게를 발려 먹는 모습이 역시나 꽤 귀엽다. 


이어서 홍게 라면을 끓인다.

물 양 조절을 잘못해서 약간 싱겁기는 했지만, 그래도 게 향과 열라면의 얼큰함이 꽤 잘 어울린다.


그 많던 게를 다 먹고, 라면까지 끓여서 배불리 맛있게 먹었다. 소식은 실패했으니 소화를 목표로 한다. 이제 정리만 남았다. 먹는 것 이상으로 번거로운 시간이 남은 것이다. 산더미같이 쌓인 게 껍질을 잘 묶어 버리고, 식탁 주변 사방팔방으로 튄 게 부스러기들을 다 닦아야 한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향을 피워 게 냄새를 없애야 한다. 이렇게 바로 하지 않으면 게 비린내가 일주일은 간다. 청소를 다 하고 나니 벌써 소화가 된 기분이다. 


게를 먹는다는 것은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다. 찔 때부터도 번거로운데 먹는 것 자체도 너무 번거롭다. 그리고 다 먹고 나서 정리하는 것 역시 정말 번거롭다. 그렇지만 그 모든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당할 만큼 맛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게를 먹고, 기쁘게 뒷정리를 마쳤다. 조만간 또 날을 잡아서 다른 게를 먹어야지. 어쨌든 나는 오늘 홍게를 먹었고, 신이 난다. 홍홍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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