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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게를 먹는다. 홍홍홍

기록하는 2022년│Episode 37│2022.03.08

by 김자기

바로 어제 야식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건강한 식사를 목표로 한다고 구구 절절 일기에 써놓고 이렇게 바로 다음날 이 정도로 과한 저녁을 먹는다는 것이 어딘가 모르게 조금 창피하다.

하지만 늦은 시간에 먹은 것은 아니고, 배달 음식도 아니었고, 또 게는 몸에 나쁘지 않은 음식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먹어도 괜찮을 이유는 많다. 역시 나는 나에게 굉장히 관대하다. 이 역시 창피한 부분이다.


갑자기 홍게를 왜 먹게 된 것이냐. 지난 주말 동네 산책을 하다가 새로 생긴 홍게 집을 발견했다. 늦은 시간이었는데 그 가게만 불이 환했다. 수조 한가득 차있는 홍게와 고소한 게 찌는 냄새에 마음을 빼앗겼다. 바로 먹고 싶었지만 잘 이겨내고 조만간의 좋은 날을 기약했다. 그리고 그 조만간이 바로 오늘이다. 내일은 선거일이라 출근하지 않으니 오늘 밤은 길다. 그리고 남편은 오늘 마감을 끝냈다. (물론 나는 아직 안 끝났다. 휴. 마감 생각을 하니 갑자기 또 걱정이다.) 이보다 좋은 날이 또 있을까. 역시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한 이유는 수백 가지도 만들어낼 수 있다. 기분이 좋을 때는 기분이 좋아서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에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한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축하해야 하고,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힘을 내야 한다.


어쨌든 홍게를 먹기로 결정하고 전화로 포장 주문을 예약했다. 게를 찾으러 가는 길은 발걸음도 가볍다.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따뜻하다. 게 먹기 딱 좋은 날이다. 가게에 도착하니 이미 포장 완료다. 직접 찾으러 왔다고 3,000원 할인과 함께 라면 세트(라면용 홍게 + 열라면)를 서비스로 받았다. 가능하다면 배달을 줄여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다. 배달을 시켰다면 배달비가 3,000원이었을 테니 일단 6,000원을 아꼈다. 그리고 음식을 찾으러 오고 가는 동안 아주 조금의 걷기 운동도 할 수 있다. 또 깨끗한 가게 내부와 친절한 사장님을 직접 뵈니 괜히 반갑고, 게도 더 맛있을 것만 같다.


집에 와서 포장을 뜯는다. 별도의 손질은 없다. 생각했던 것보다 양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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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주문할 때는 대게나 킹크랩이 아닌 홍게라서 먹을 것이 있을까, 살수율이 괜찮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막상 받아보고 뜯어보니 오히려 다 먹을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다. 게마다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다리 살도 제법 있는 편이다. 당연히 다 먹겠지만 혹시라도 다 못 먹으면 게 살을 발라내서 내일 게살 파스타를 해 먹어야지. 남편과 식탁에 앉아 본격적으로 게를 발려 먹기 시작한다.


그나저나 요즘 남편과 노는 게 제일 재미있다. 연애 때도 남편과 노는 것이 제일 재미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내 생활도 재미있었었고, 내 친구들도 재미있었고, 나 혼자만의 시간도 재미있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 남편과 노는 것이 유독 더 재미있다. 남편과 함께 하는 것이 결혼 전보다 당연해지고, 코로나로 친구들도 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하다 보니 남편과의 시간에 더 익숙해지고 편안해진 것 같다. 특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남편과 수다 떨고, 뒹굴 거리는 것이 정말 즐겁다. 그래서인지 요새 사회성이 예전에 비해 조금 떨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된다. 내 생활 없이 무조건 남편에게 의존하게 될 것이 걱정인 것이 아니다. 그렇지는 않다. 그냥 뭐랄까. 어쨌든 나와 가장 잘 맞고, 나를 가장 이해해주고, 나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시간을 오래 보내다 보면 그런 관계가 당연해지고, 세상을 너무 긍정적으로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걱정이 된다. 이게 무슨 걱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내 사회성이 조금 걱정되지만, 어쨌든 남편과 노는 게 제일 재미있다는 것이다.


남편과 신나게 수다 떨다 보니 벌써 거의 다 먹었다. 다 먹을 수 있을지를 걱정했던 것이 민망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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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전 남편은 게나 새우처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너무 번잡스러워서 별로라고 했었는데, 해산물을 워낙 좋아하는 나를 만나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하다 보니 어느새 나만큼 해산물을 좋아하게 됐다. 번잡스럽다고 했던 그 사람은 어디 갔는지, 옆에서 부산스럽게 게를 발려 먹는 모습이 역시나 꽤 귀엽다.


이어서 홍게 라면을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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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양 조절을 잘못해서 약간 싱겁기는 했지만, 그래도 게 향과 열라면의 얼큰함이 꽤 잘 어울린다.


그 많던 게를 다 먹고, 라면까지 끓여서 배불리 맛있게 먹었다. 소식은 실패했으니 소화를 목표로 한다. 이제 정리만 남았다. 먹는 것 이상으로 번거로운 시간이 남은 것이다. 산더미같이 쌓인 게 껍질을 잘 묶어 버리고, 식탁 주변 사방팔방으로 튄 게 부스러기들을 다 닦아야 한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향을 피워 게 냄새를 없애야 한다. 이렇게 바로 하지 않으면 게 비린내가 일주일은 간다. 청소를 다 하고 나니 벌써 소화가 된 기분이다.


게를 먹는다는 것은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다. 찔 때부터도 번거로운데 먹는 것 자체도 너무 번거롭다. 그리고 다 먹고 나서 정리하는 것 역시 정말 번거롭다. 그렇지만 그 모든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당할 만큼 맛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게를 먹고, 기쁘게 뒷정리를 마쳤다. 조만간 또 날을 잡아서 다른 게를 먹어야지. 어쨌든 나는 오늘 홍게를 먹었고, 신이 난다. 홍홍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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