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는 접시, 주스는 텀블러에 주세요.
노동절 다음 날은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아침이었다. 지붕을 뚫고 들어 올 것 같이 내리는 비가 기분 좋은 배경음악을 더해준다. 다만 한껏 더워진 땅을 식히면서 올라오는 뜨끈한 수증기는 땅이 완전히 식혀지기 전까지 후덥지근한 대기를 만든다.
잠시 에어컨 아래에 누워 밖에서 내리는 시원한 빗소리를 들으면 책을 읽으니 또 다른 여행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이런 날이 있을 줄 알고, 쿠바는 인터넷이 어렵다고 해서 멕시코에서 미리 받아둔 전자책을 열어 몇 장 읽어 내려간다. 워낙 재미있고, 짧은 책이다 보니 술술 넘어가더니 어느새 한 권을 다 읽어 버렸다.
마지막 책장을 닫으니 슬슬 배가 고파졌다, 주방을 써도 된다고 했지만 매일 저녁은 랍스터를 먹고, 아침을 포함된 숙소이니, 해 먹을 일이 전혀 없었다. 식료품이 흔하지 않은 곳이라 딱히 뭘 해 먹기도 어렵다. 그래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가 그친 거 보고는 바로 밖으로 나왔다.
간단한 게 만들어 파는 음식은 비교적 저렴해서 부담 없이 사 먹을 수 있으니 근처 열린 가게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하지만 대부분 아침에 내린 폭우로 인해 아직 장사를 하지 않는 곳도 있고, 비가 그친 이제야 장사를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다.
온 동내가 빗물로 가득했다. 심지어 도로는 하수에서 물이 범람해서 그런지 메인 광장에서 우리 숙소 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원래 트리니다드에서 비를 맞이하게 된다면,
'절대로 흐르는 물이 닿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워낙 오래된 도시라 그런지 하수 시설이 노후되어 집에서 쓰고 나서 처리장으로 들어가야 할 오수와 하수들이 비가 오면 범람하게 된다. 그러니 도로 위를 범람하는 물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출처 불명의 물일 수 있다. 거기에 수많은 마차들의 말들은 화장실이 따로 없으니 그 도로를 씻어 내려오는 물이라면 많이 고민을 해 볼 필요도 없지 않을까? 그러니 어릴 때 고인 물을 첨벙하고 뛰어올랐던 기억이 있다면, 여기선 잠시 접어두는 편이 옳다.
다행히 얼마 안 가서 문이 열린 작은 가게를 발견하고 빵을 하나 집어 들었다. 단골손님들도 있으니 믿고 하나 사 왔는데, 어제 먹던 꽉 찬 돼지고기는 온데간데없고, 빈약한 햄 한 조각에 소스만 가득했다.
뭐 그래도 배가 고프니 한입 크게 베어 먹었다. 역시나 두 번 베어 먹으니 순식간에 사라진 샌드위치였다. 배는 아직 창 기미가 없으니 오는 길에 봤던 피자가게에 들러 피자를 사야겠다.
피자가게에 도착을 했는데, 여기가 포장이 안된단다. 봉투도 없고 피자 박스는 당연히 없다.
아, 여기 쿠바였지.
숙소로 얼른 달려가 숙소에 있는 접시를 하나 들고 나왔다. 포장 주문을 하고 접시를 들고 오겠다고 해서, 미리 주문한 피자는 화덕으로 들어가 있었다.
화덕에 들어간 피자는 금방 익어 나왔다. 그리곤 가지고 온 접시에 담겼다. 밀가루 빵 위에 소스만 가득하고 토핑은 특별할 것 없는 피자가 접시 위에 올려져 있다. 들고 오면서 혹시나 온기가 식어 버리까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래도 음료수는 마셔야 하니 집 앞에 과일가게로 들어갔다. 여기선 콜라는 당연히 찾아볼 수 없으니 음료를 하나 사가야 했는데, 그곳 또한 당연히 들고 갈 일회용 잔이 없었다.
주스도 어쩔 수 없이 갈아서 만들어 주는 걸 기다렸다가. 여행 내내 들고 다니는 텀블러에 담아 달라고 했다. 병을 보고 신기해하는 아주머니는 잔뜩 갈아서 만든 주스를 텀블러에 조심스럽게 잘 담아 주셨다. 두 잔 모두 담아 나왔는데, 집에 와서 다시 컵에 부어 갈라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환경문제를 생각하면 쿠바에서 처럼 사는 게 제일 현명한 방법인 것 같다. 배달을 많이 시켜 배달 전용 용기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지금의 시대에 용기를 들고 음식을 받으러 가는 일이 낯선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뉴스엔 어떤 메뉴는 주문해서 온 용기가 한 방가 득 채워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계속되는 주문에 빈 용기만 쌓여가는 다큐를 본 적도 있었다. 환경을 생각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환경뿐만 아니라 배달 주문을 시키는 가격보다 배달 가격이 더 비싼 경우도 있다면서 기사화된 것을 본 적이 있다. 서비스에 대한 정당한 비용이 문제가 되겠냐만, 너무 많이 움직이지 않으려는 생각도 조금 고칠 필요가 있다.
여행의 장점이 뭐냐 물으면 선뜻 무엇이라 말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아마 그건 내가 살아가는 생각이 조금 바뀌어 삶에 녹아들어 버린 바람에 설명하기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쿠바에선 내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직접 접시에 담아서 집에 들고 와서 먹는 게 당연했다면, 한국에서 되도록 가게에 전화를 해서 주문하거나 내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음식을 직접 가서 시키는 경우가 많다.
주문을 해놓고 포장을 해서 오는 경우도 많이 있고, 집에 가는 길에 들러서 사가는 경우도 많다. 누군가는 어플에 적응을 못했다고 하거나 괜한 고집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삶은 모두가 다른 경우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누군가는 맞다고 하고 누군가는 틀렸다고 하겠지만, 결코 다름이 오답이 될 수는 없다.
아직 비 온 뒤의 트리니다드는 마르기 전이다. 골목마다 움푹 파인 곳에는 아직도 물이 고여 있다. 젖은 도로 위, 사람들이 물을 피해 다니기도 하고 자동차들도 속도를 줄이며 지나간다. 다들 잘 적응을 하고 있다.
사진에 나오는 음식을 들고 다니는 나의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언젠간 모두의 손에 용기를 들고 다닐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배달의 문화가 잦아들고 먹고 싶은 음식을 직접 들고 집으로 가는 사람들이 늘어 날지도 모른다.
미래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