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해? 땅콩이 최고야!
뜨거웠던 열정의 연주와 룸바 댄스의 바운스가 채 가시기도 전에 마셨던 맥주가 밤을 더 깊게 만들었다. 숙소에서 돌아와서도 조금 더 늦게까지 이어진 수다에 우린 늦잠을 잤다. 밝아진 아침을 맞이해 숙소에 준비된 아침을 느지막이 일어나 먹고 숙소 밖으로 나오면 이제야 하루가 시작된다.
심지어 오늘은 날씨도 한몫을 한다. 맑음을 넘어서 깨끗해진 하늘을 머리에 얹고 산티아고 데 쿠바의 시가지를 탐방하기 시작했다.
숙소 밖으로 잠시 걸어 나오니 반가운 수레가 보였다. 아바나에서도 무더운 혁명광장 앞을 지키고 있던 냉차를 파는 수레다. 나름 시원함을 잘 지키고 있는 수레의 차가운 음료는 아마 쿠바의 더위를 식혀줄 수 있는 유일한 편의점 같은 곳이다.
슈퍼에서도 아이스크림을 팔지 않는 곳이고, 아이스크림 가게에 긴 줄을 보면 사 먹을 엄두도 나지 않는 이곳에서 여름 더위를 잠시나마 식혀 줄 수 있는 유일한 단비가 여기 있었다.
사진으로 찍고 봐도 비현실적인 날씨가 배경이 되어 더욱 냉차 수레를 궁금하게 만든다. 하지만 밥을 먹고 숙소에서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목도 안 마르고 해서 아쉽지만 그냥 지나쳐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아주 긴 공원이 있는 거리였다. 사람들이 그늘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고, 바람을 맞이하는 모습이었다. 우리도 천천히 풍경 속을 걸었다. 공원가에 있는 한 의자 위에 앉은 두 노인의 곁을 지나는데, 고소한 냄새에 뒤를 돌아봤다.
노인의 손에 들려진 삼각뿔 모양의 종이에 눈이 간다. 이게 뭐냐고 물어본 형의 질문에 하나 먹어보라는 아저씨의 무뚝뚝함. 그 무미건조함 속 따뜻한 목소리에 종이를 넙죽 받아 든 우리는 말려있는 종이를 살살 풀어냈다. 그러자 종이 속에 나온 것은 바로 땅콩이었다.
하나 집어 먹어 보니 조미가 되어 간이 짭조름한 땅콩이었다. 땅콩이 들어 있는 깔때기는 어르신 앞에 놓인 통에 가득 들어 있었다. 아마 이걸 팔아 수입을 하시는 것 같았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권하지도 않고 그냥 앉아 계시는 어르신의 모습에 우리도 모르게 스스로 지갑을 열었다.
하나에 100원 정도 하는 땅콩은 우리 손에 10개씩 들려 있다. 잔돈이 없어서 큰돈만큼 다 사버린 것도 있지만 말 그래도 심심해서 샀다. 대중교통 이동이 택시가 아니면 방법을 알기 어려워 주로 걷어 다니는 편인데, 한참을 걸어 다니다 보니 늘 심심했다.
입에 뭐라도 넣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나는 땅콩 10개에도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땅콩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길을 가는데, 노랗게 호텔 같이 생긴 건물이 눈에 띄었다. 노란 건물은 학교 건물이었는데, 궁금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정문에서 운동장까지는 출입을 할 수 있었는데, 건물 안쪽은 안전상의 문제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학생들의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학교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적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가까이 볼 수 있는 행운의 날이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는 안쪽에서 시끌한 소리가 들려온다. 뛰어다는 애들도 있고, 책을 들고 이동하는 애들도 보였다. 학생들이라 사진은 찍지 않았지만 우리 학교 다닐 때랑 비슷해서 입꼬리는 올랐다.
여기가 제2의 도시라고 느낀 게 바로 아파트를 보면서 였다. 아파트가 자주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 낮은 건물들 사이에 군계일학과 같아 눈에 띈다.
아바나와 같이 도로는 비어있고, 지나다니는 차는 월드컵 한일전이 열리는 한국의 시내 모습과 같았다. 휑한 도로를 지나는 중에도 땅콩을 먹다 보니 심심한 건 좀 덜 했지만,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슈퍼라도 찾을 요량으로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다니다가 시장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여있고 천막으로 볕을 가리고 있기에, 우리도 살짝 더위를 피하고 마실거리를 찾아볼까 하고 들어갔다. 시장은 의외로 파는 물건이 많았다. 심지어 카페라고 적힌 곳에서는 음식을 팔고 있었다.
시장은 분주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에 돈이 오고 가고 있었고, 봉투가 여유롭지 않은 쿠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 바구니에 종이로 감싼 생선과 고기들을 넣기도 했다.
메뉴엔 물이 없기도 했고, 음식 앞에 서있으니 배도 고프고 해서 밥을 주문했다. 밥을 주문하면 물을 한잔 주는데, 사실 어디서 온 물인지 알 수 없는 물이었다.
하지만 원효대사 해골 물이라고, 그냥 목이 마르니 컵에 담긴 물이 그저 시원한 맛이 있었다.
조금 뒤에 나온 점심은 내가 쿠바에서 먹은 음식 중에 최고의 맛이었다. 그렇다 할 식문화는 찾아볼 수 없는 쿠바에서 이렇게 맛이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감자튀김이나 커플렛, 주로 파스타의 식문화는 이곳에서 먹은 한 그릇으로 완전 다른 맛이었다.
야들해진 돼지고기의 살코기와 간장이 기본양념이 된 갈비찜 같은 맛이었다. 치킨도 찜닭 같은 맛있었는데, 여기서 이런 양념 맛을 볼 줄 몰랐다.
간이 별로 없고, 갖은양념을 잘 쓰지 않는 이곳에서 이렇게 자극적인 맛을 본다는 것이 행운이었다.
하나씩 주문해서 나누어 먹으려 했지만 한번 먹기 시작한 음식은 쉽게 나누어 먹을 수 없었다. 각자 앞에 놓인 그릇의 음식을 다 비우고서 나서야 나누어 먹을 생각이 났다. 그만큼 정신없이 먹어 버린 나의 점심은 최상이었다. 시장 살만했던 재료는 없었는데, 이 집에서 먹은 음식은 또 한 번 먹고 싶었다. 그만큼 인상 깊은 맛이었다.
산티아고 데 쿠바의 시가지는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있었다. 오늘의 행운인지 여행자의 행운인지 모르지만 볼거리 먹을거리에 부족함은 없었다. 적당히 더운 날씨에 시원한 바람의 조화를 이루듯 산티아고 쿠바의 배경에 우리도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현지식도 잘 찾아 먹어 버리는 나는 어느새 편안해진 산티아고 데 쿠바의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