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적 현실
여행을 하다 보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믿기 힘든 경우가 많이 있었다. 중국의 장가계와 원가계, 네팔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볼 때가 그랬다.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나 이과수 폭포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비현실적 풍경은 내가 사는 나라에서 보고 자라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내가 놀라며 봤던 수많은 장관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는 본 적이 없는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가파른 절벽, 카스트르 지형 (지반이 솟아나거나 가라앉아서 만들어진 지형) 혹은 수 킬로미터에 걸쳐 만들어진 낙수의 도미노는 전혀 상상을 할 수 없는 풍경이기에 보고 있어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안나푸르나의 만년설은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을 녹지 않고 보냈고, 떨어지는 폭포수는 계산하기 힘든 엄청난 위치에너지를 방출하며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시작선에서 있다. 깎아서 만들 수도 없는 지형을 보고 있으면 누구도 이곳을 파괴할 권리는 없겠다 싶어 진다.
카리브 해변에 있던 순간도 그랬다.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사는 대한민국 삼면의 바다로 되어 있어 바다를 보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동해, 서해, 남해 역시 아름답고, 신비했다. 바다 전부를 본 적이 없고, 전부 들어가 본 적이 없어 단정 지을 수 없다.
하지만 바다 색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색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바다색이 에매랄드 색이다'라는 말이 있다. 어렸을 적 '바다는 에매랄드 색이다'라는 말을 거의 세뇌처럼 배웠는데 직접 보니 그 색이 무슨 색인지 알 것 같았다. 앞으로 이름 모를 보석을 보면 이 바다색을 떠올리며 에매랄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태양이 작렬하는 모래사장 위, 선텐 의자에 앉아 내리쬐는 태양을 받으며 쉴 새 없이 왕복운동을 하는 파도를 보며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휴가는 휴가답게 보내고 싶었다. 한국을 돌아가는 여정의 끝에 있어. 일주일이 지나면 한국에 있을 예정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
오늘따라 날씨가 돕질 않는다. 하늘에 뜨거운 태양은 하늘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의 구름에 가려 전혀 보이질 않았다. 바람이 없어 구름이 걷힐 것 같아 보이지 않고 오후 5시의 조도를 유지했다. 어쩌면 오히려 더 좋은 환경일지도 모르겠다. 괜히 짙은색이 들어있는 선글라스를 꺼내 들고 나와야 했을지도 모르고, 선텐을 하기 위해 발라야 하는 로션들도 챙겨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해가 없으니 이 모든 것이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해변에 놓아둔 의자에 누워 있으니 휴가의 기분이 젖어든다. 해가 뜰 것이라 예상한 직원들은 의자를 야자 나뭇잎으로 만든 파라솔 아래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날씨가 그들의 예상을 빗나가니 하늘을 가리고 있는 지붕이 오히려 거슬렸다. 하얀 플라스틱으로 된 의자를 가볍게 들고 바다 가까이 들어 옮겼다. 산책을 즐기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다니는 통로를 피해 바다 가까이로 옮겼다.
이제 바다가 가까이 보인다. 모래 장난을 하고 있는 아이들과 그들의 곁에 부모들이 보인다. 모든 장면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이방인 같은 느낌도 든다. 온전히 이곳에 섞어 즐기지 못하는 내가 의아했다.
여행보다 더 익숙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잠시 휴가를 나온 것 같이 손님이 되어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여행을 다니는 동안에는 현지에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지냈다. 편하고 익숙한 느낌을 가졌기 때문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어쩌면 호텔에서 묶는 이 상황이 처음이라 감정이 증폭되었을 수도 있다. 내가 머물던 숙소는 사람 사는 냄새 가득한 곳이었다. 쿠바의 까사 특성상 주인과 공간을 공유하며 살았고, 여행자끼리 왕래가 잦았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해서는 형과 나 조차도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휴가를 즐기는 중이었다.
호텔에 사람들이 가득하긴 했다. 가족이 휴가를 왔고, 신혼여행으로 이곳을 선택한 부부도 있었다. 촬영을 위해 이곳을 온 사람들도 기계를 들고 움직인다. 교점이 없다. 늘 분주하고, 시끌벅적한 환경이긴 했다. 그럴수록 내 주변은 한없이 고요했다. 군중 속에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는 것처럼 의자에 누워 있는 시간이 그랬다.
해변의 시간은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긴 여행의 휴식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쿠바에 들어온 지 3주가 넘었다. 30일 비자를 받았고, 연장을 안 했으니 곧 출국 날짜가 다가왔다. 쿠바에서 나가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것인데, 아쉬운 마음도 크다.
쿠바에서의 시간이 스친다. 불편한 교통 상황에서도 동쪽 끝까지 다녀왔다는 사실이 나름의 자랑이 된다. 물론 얻은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었는데, 이동을 자주 하게 되면서 한 도시에서 머물렀던 시간이 짧았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 도시에 들어가면 10일 정도는 안 나오고 머물러야 했는데, 2박 3일의 짧은 기간을 머물러야 했으니 아쉬운 마음도 컸다. 그나마 각 도시에서 만났던 숙소 주인들이 워낙 친절했고, 만난 사람들이 좋았기 때문에 즐거운 시간이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기대하지 못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 여행의 최대 매력이라면, 쿠바 여행은 매력적인 여행이라 할 수 있겠다.
영화를 보다 보면 잠이 들어 무슨 내용인지 모른 채 나오는 경우는 그 영화가 상당히 지루하고, 볼품이 없다는 뜻이다. 반대로 영화관을 나오는 게 아쉬울 정도로 그 영화에 빠져 못 나오는 영화가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몰입감이 최고라는 이야기다. 이곳에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내용이 생각 안 날 정도로 지겹고 재미없는 여행이 아니라 몰입감이 뛰어나다는 말이다. 이곳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머물러 있는 시간이 역동적이고, 흥분시키는 매력이 있었다. 그렇게 여행이 정리되었다.
피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긴 여행에도 그 끝은 존재하고 시간을 앞으로 향하니 그 끝은 다가오는 중이다. 마지막 여정인 아바나를 앞두고 생각을 쉬게 할 수 있는 곳이라 방문한 이곳에서 더 복잡하고, 정리되지 않는 생각을 하며 럼주 한잔을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