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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번역가 Oct 10. 2023

제7년

번역 프리랜서의 매력 가운데 한 가지는 컴퓨터만 있으면 당장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사용하던 노트북 한 대 달랑 가지고 시작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가 설치되어 있던 터라 소소하게 일감이 들어올 때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D사와 프리랜서 계약을 할 때 워드패스트란 번역 소프트웨어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소프트웨어를 필수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할인가로 400유로가량이었다. 400유로라니. 당시에는 그 소프트웨어가 내게 어떤 가치를 가져다줄지를 알 길이 없으니 당연히 돈이 아까웠다. 직장에서는 업무에 필요하면 뭐든지 회삿돈으로 구입할 수 있었으니 아직 벌이가 시원찮은 프리랜서로서 느끼는 부담이 꽤 컸다. 하지만 뭐 이런 걸 다 사라고 하나 싶어 프리랜서로 등록하지 않았더라면, D사와의 거래를 통해 그 400유로(약 57만 원)가 매년 수십 배의 가치가 되어 돌아올 기회를 놓쳤을지도 모른다.


D사와 거래한 지 몇 년이 지나는 시점에 D사 같은 대형은 아니더라도 중간 규모의 거래처가 한두 곳만 더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고객망을 확대할 방법을 좀 알아보니 웬만한 곳은 번역업계의 오피스라고 할 수 있는 트라도스라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트라도스의 가격은 660달러(약 90만 원)였다. 그런데 문제는 트라도스가 윈도우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에 윈도우가 필요했고, 맥 노트북과 윈도우 간의 원활한 호환을 위해 호환 소프트웨어가 필요했고, 윈도우용 오피스도 필요했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을 구매하는 데 1천 달러(약 135만 원)가 들었다. 당장 필요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게다가 설치도 온종일 걸렸다. 그런데 사람 일은 참으로 알 수 없었다. 눈여겨보았지만 트라도스가 없어서 작업을 맡길 수 없다던 몇몇 업체에 나도 이제 그 시스템을 갖췄노라고 알렸다. 놀랍게도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 트라도스로 작업해야 하는 1천 300달러(약 175만 원) 짜리 일을 맡게 되었다. 어떤 경제경영서에서 회사의 인력 충원에 너무 주저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것을 읽었다. 한 사람을 더 뽑으면 그 직원이 회사의 기존 업무를 나누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기 몫을 하기 마련이라서 새로운 업무를 찾아서 하게 되고 회사가 그만큼 더 확장한다는 것이었다. 프리랜서도 기회가 어디에서 어떻게 다가와 업무 영역을 넓혀 줄지 모르니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투자도 필요함을 여실히 느꼈다.


사실 트라도스가 내게 경제적 기회만 준 건 아니었다. 거래 관계지만 인연이라고 말해도 좋을 거래처를 만나게 되었다. 내가 어디엔가 올려놓은 프로필을 보고 G사의 인사 담당자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주 정부 프로젝트를 새롭게 따냈고 곧 프로젝트가 시작될 예정이라며 관심이 있다면 프리랜서 등록 절차를 밟지 않겠냐고 했다. 샘플 테스트를 거친 뒤에 정식으로 등록했고, 그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다. 매우 중요한 클라이언트이니 번역에 각별하게 신경을 써달라고 했다. 원문이나 번역이 절대로 누설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나도 덩달아서 비장해졌다. 원문의 난이도 면에서는 까다롭지 않았으나, 형식을 맞추는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번역을 접하는 사람들이 이익을 얻어서도 손해를 봐서도 안 되기에 원문에서 더해서도 빼서도 안 되었고, 어미 하나까지도 일관성을 무시해서는 안 되었으며, 한국어를 모르는 의뢰인이 한국어 번역을 확인하면서 생기는 아주 사소한 의문도 일일이 설명해주어야 했다. 가령, 여기에는 ‘을’인데 저기에는 왜 ‘를’이냐 이런 사소한 문법까지 일일이 설명해야 했다. 괜히 시작했다 싶었다. 번역 속도가 반 이하로 뚝 떨어지니 아무리 주 정부 프로젝트라도 할 가치가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밀어 오르는 마음을 꾹꾹 누르며 번역을 꼼꼼하게 확인했고, 의뢰인의 질문에 꼼꼼하게 답했다. 그러고는 나는 매년 두 번씩 진행되는 그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G사는 정부 프로젝트를 따내는 데 수완이 좋은 모양이었다. 나와의 첫 거래가 주 정부 프로젝트였고, 그 이후로도 굵직한 정부 프로젝트를 간간이 의뢰해 왔으니까. G사는 정부 관련 새로운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나에게 연락해 왔다. 일하다 보면 내가 사회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 가지 이유는 업무상 사람을 만날 기회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직장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명시적 혹은 묵시적 인정을 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반해, 프리랜서로서 거의 자동화된 업무 프로세스 가운데 일하다 보니 거래처 '사람'으로부터 이메일을 받는 일이 별로 없다. 한 번은 내 온라인 프로필을 보고 어느 대학원생이 온라인 설문조사의 번역을 의뢰해 왔다. 설문조사의 한국어 버전이 온라인상 제대로 표현되었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굳이 맨해튼에서 만나서 진행한 적도 있다. 일적으로 사람과 대면하는 일이 흔했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 작업을 온라인으로 끝내려고 했을 텐데 말이다. G사는 그런 나를 알기라도 하듯 긍정적인 피드백을 지속적으로 제공해 주며 사회적 인정의 목마름을 채워 주었다. 1천 달러 투자가 이런 관계까지 만들어주는 것을 보면 사람 일은 정말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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