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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번역가 Oct 12. 2023

제9년

안정성을 추구하는 내가 프리랜서가 되기를 원했다는 점은 이율배반이다. 아마 안정보다 자유가 더 중요해서 그랬을 테다. 번역 프리랜서가 충분한 수입을 벌기란 쉽지 않다. ‘충분한 수입’이 얼마냐는 개인차가 있겠지만, 한국을 떠나온 뒤로 늘 적극적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 삶을 살았고, 그것이 몸에 깊게 밴 이 프리랜서는 가정 경제에서 절반의 몫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주 괴로웠다. 하지만 번역의 테두리 안에서 어떻게 수입을 늘려야 할지를 고민했지, 그 밖에서 무엇을 어떻게 더 해야 할지를 잘 모르는 외골수였다. 내가 번역한 책을 직접 출간해보고 싶었으나 여러 면에서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 소심쟁이가 되어 버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의 괴로움을 줄이고, 남편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덜며, 안정된 노후를 추구하기 위해서 가족회의 끝에 부동산 투자를 해보기로 했다. 번역 일 운운하다가 갑자기 주택 투자라니 언뜻 뜬금없어 보이기는 해도 사실 그렇지는 않다. 좀 더 안정된 프리랜서가 되기 위해 직장인 시절에 집을 사서 임대하고서는 스페인으로 가려던 계획을 10년 만에 다시 꺼내서 수정했던 것뿐이었다. 그때까지 어떤 방식으로든 본격적인 투자를 해본 적은 없으나 뼛속까지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 오래 살면서 유학생 시절 생활고도 겪어본 탓인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난 적은 없었다. 대단하게 투자한 적은 없었고 번역 클라이언트의 주식을 샀다가 몇 천 달러를 손해 본 흑역사도 있었지만, 일단 투자를 하면 성공률은 높은 편이었다. 달러가 올랐을 때 한국 통장으로 송금해서 차익을 얻었고, 원/달러 환율이 정상화되기를 기다리며 금 상품에 투자해 차익을 얻었고, ETF가 뭔지도 모르면서 샀다가 두 배로 오른 경험을 했다. 여기에 비하면 주택 투자는 실로 큰 투자였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그만큼의 안정성이 확보되는 기회였다.


코로나 백신 접종이 의료 종사자 등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부터 선별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할 무렵에 투자용 주택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니 국가적 봉쇄 조치가 곧 끝나거나 아니면 적어도 완화될 거라는 판단이었다. 유명 관광지 인근에 상권과 교통이 발달한 동네에서 맘에 드는 집을 찾았다. 오퍼를 넣었고, 받아들여졌다. 집주인은 그 집을 꼭 팔아야 할 이유가 있었고, 팬데믹이 한창 진행 중이었으므로 부동산 시장은 아직 구매자 시장이었다. 현금으로 살 형편이 안 되어 대출을 신청했는데, 거기에서 우여곡절이 시작되었다. 투자용 주택이라 조건이 까다로웠고, 요구되는 문서들이 주거용과는 차원이 달랐다. 오퍼가 받아들여졌다는 기쁨, 까다로운 문서 요구에 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난데없는 복병의 등장으로 대출이 거부되어 느낀 좌절, 한 번 더 시도해 볼 수 있다는 희망을 봤을 때의 안도, 한 차례의 대출 거부로 인해 더 심해진 불안 따위의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각종 문서 요구에 응하느라 4개월 동안 진땀을 뺐으나 결국 해냈다.


4개월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은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그 주택을 하나의 사업체로 운영하게 되면서 번역 외골수의 내 시야가 조금씩 넓어졌다. 내가 주도적으로 진행한 투자의 성공 경험과 그 주택이 우리 가족의 노후 생활에 큰 보탬이 될 거라는 안정감 덕분인지 점점 더 변화를 꺼려가던 내가 자발적 시도들을 할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한국에서는 카라반이라고 부르는 캠퍼를 구매해 캠핑을 시작했다. 그랜드캐니언이나 요세미티 국립공원 같은 대자연을 마주할 때마다 이런 데서 눈을 뜨고 일하고 산책하면 어떤 기분일지 늘 궁금했었는데, 드디어 할 수 있게 되었다니 너무나 설레는 일이었다. 물론 그런 대자연은 워낙 멀어서 큰맘 먹어야 갈 수 있으니 천천히 가보기로 하고 우선 가까운 곳부터 찾아다녔다. 캠핑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캠핑이 몸에 익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한 데다가 차에 캠퍼를 연결하고 해제하는 일, 캠퍼를 ㅂ달고 후진 주차, 복잡한 도로 주행 등 캠핑 외에 몸에 익혀야 할 게 너무 많아서 버거웠다. 하지만 일단 캠프장에 캠퍼를 주차한 뒤 장비를 셋업하고 나면 모닥불을 피우고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며, 밤이면 캠퍼 안에서 안락하고 안전하게 잘 수 있다는 점에서 캠핑은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추수감사절 연휴에 남편이 한국에 가고 없는 틈에 처음으로 봄을 데리고 단둘이 캠핑에 나섰다. 캠퍼를 뒤에 달고 일고여덟 시간을 열심히 달려 도착한 캠프장은 입구부터 아름다웠다. 소수의 캠핑 생활자에게만 허락된 듯 입구에는 캠프장 안내원 한 명과 두서너 대의 캠퍼가 대기하고 있었다. 체크인을 마친 뒤 무성한 솔밭 사이로 깨끗하게 닦인 포장도로를 따라 우리 사이트로 가는 길은 탄성이 절로 났다. 이런 데가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산책하는 사람 한두 명 정도만 보일 뿐 인적이 드물었다. 미국 캠프장이 비교적 한적한 편이기는 해도 대개 옆 사이트의 사람들이 보이거나 소리가 들리기 마련인데, 여기는 사이트 간격도 넓어 주위에 아무도 없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캠핑 생활에 아직 적응하는 중이라 혼자서 장비를 설치하느라 힘들었지만,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 수고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캠퍼의 수평을 맞추고, 수도와 전기를 연결하고,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하고, 모닥불에 더하려고 화력이 좋은 솔방울도 주웠다. 먼 길 오느라 수고한 봄과 산책도 했다. 산책 중에 간간이 마주치는 사람들만이 이곳이 우리가 전세 낸 곳이 아니란 사실을 일깨워줄 정도로 조용하고 한적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있다는 점과 좀 더 조용하고 한적하다는 점이 달랐지만, 생활의 측면에서는 집에 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원래 집에서 하던 대로 아침에 일어나 산책하고, 밥 먹고, 일하고, 넷플릭스 보고, 잠자리에 드는 일상을 보내다가 문득 사오일쯤 지나던 밤에 '내가 지금 여기에서 혼자 뭐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전에 느껴보지 못한 깊은 외로움이 몰려왔다. 우리 동네가 워낙 조용해서 단지 관리 인력의 소리를 빼면 낮에도 이웃의 차가 드나드는 소리만 들릴 뿐 말소리가 나면 귀를 쫑긋하게 될 정도다. 집에서는 며칠을 혼자 지내도 외롭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심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인적이 드문 자연에 며칠 머물자니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 사회적으로 고립된 내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깊은 외로움이 나의 사회적 고립감을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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