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느 번역가 May 25. 2023

이렇게 살다가 늙어 죽는 건가 싶더니

이렇게 살다가 늙어 죽는 건가 싶었다. 그럴싸한 프리랜서가 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던 것 같은데, 이제 그런 애씀의 흔적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평일에는 강아지와 산책하고, 밥 먹고, 번역하고, 집안 살림하고, 텔레비전 보고, 주말이면 집에서 뒹굴거리거나 쇼핑을 가거나 산에 가거나 여행 가는 생활. 너무나 안정적이고 무탈한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날 "번역하고"에서 "애씀"이 빠져버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렇게 밋밋하게 번역하다가 끝나는 걸까? 칠팔십이 되어 후회하지 않을까? 불안감이 희미하게 일었다.


뭐든 일감이 있으면 덥석덥석 받으며 한창 버둥거리던 시기가 있었다. 다행히 억지스러운 클라이언트는 없었지만, 주로 하기 싫은 일만 의뢰하는 클라이언트들은 있었다. 무던히 애를 쓰던 그 시기에는 연락만 와도 반갑더니 언젠가부터 슬슬 귀찮고 번거롭게 느껴졌다. 이 일은 이래서 싫고, 저 일은 저래서 싫었다. 하나씩 쳐내며 내 입맛에 맞는 클라이언트 하고만 거래하다 보니 알맹이만 남았고, 평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짜릿함이라고는 못 느끼는 프리랜서가 되어 있었다.


무탈한 삶을 추구하기는 했으나 내가 사랑하는 이 일이 이렇게 단조롭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이 일에 더 이상 큰 에너지가 소모되지 않았고, 나는 남는, 그것도 많이 남는 에너지를 딴 데로 돌리기 시작했다. 코로나 백신이 내 가족에게도 차례가 올 즈음에 캠핑생활을 시작했다. 돈이 이만저만 드는 일이 아니었지만, 쇼핑에 써버리는 것보다는 훨씬 건강하다고 생각하니 괜찮았다. 게다가 나는 노트북과 인터넷만 있으면 일할 수 있는 프리랜서가 아닌가. 웅장한 그랜드 티톤의 뾰족뾰족한 능선을 다시 보면서 번역하는 내 모습이 곧 현실이 될 테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 기회에 단조로워진 프리랜서 생활에도 활력을 불어넣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