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었던, 갑작스러운 시작
"시작"
내 나이 스물일곱, 여태까지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이걸 해도, 저걸 해도… 돌아오는 건 좌절감과 자괴감뿐이다.
'그럼 그렇지… 나 따위가 무슨…'
문득, 옛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잊을만하면 나오는, 지긋지긋한 연패의 흔적들이다.
2002년 11월 6일 2003학년도 수능시험
2006년 9월 24일 중앙선관위 9급 공무원 임용시험 불합격
2006년 10월 1일 서울시 9급 공무원 임용시험 불합격
2007년 4월 14일 중앙인사위 9급 공무원 임용시험 불합격
2007년 4월 28일 경기도 지방공무원 시험 9급(화성) 공무원 임용시험 불합격
2007년 4월 29일 경북 지방공무원 시험 9급(구미) 공무원 임용시험 불합격
2007년 10월 28일 경북 지방직 공무원 시험 9급(상주) 공무원 임용시험 불합격
2008년 4월 12일 중앙인사위 9급 공무원 임용시험 불합격
2008년 5월 24일 경기도 지방직 공무원 시험 9급(수원) 공무원 임용시험 불합격
2008년 7월 20일 서울시 9급 공무원 임용시험 불합격
2009년 4월 11일 국가직 9급 공무원 임용시험 불합격
2009년 5월 23일 경북 지방직 공무원 시험 9급(칠곡) 공무원 임용시험 불합격
2009년 7월 19일 서울시 9급 공무원 임용시험 불합격
2010년 1월 7일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편입학 자동 불합격 (학점 부족으로 인함)
슬슬, 나이도 차고, 친구들은 하나둘씩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한다. 자괴감이 찾아온다.
난 대체 여태까지 뭘 한 거지?
"2010년 12월 27일 월요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난 경북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간다. 내가 항상 가는 곳, 신관 지하 1층 열람실이다.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최근에 보고 있는 책을 꺼낸다. 사실, 편입은 크게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최근에는 PEET 공부를 해서 약학전문대학원 진학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화학과 생물을 고등학교 과정부터 보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손도 대지 않았던 물리, 화학, 생물 과목이라… 인터넷으로 EBS 강의를 보면서 공부를 하기는 해도 쉽지는 않았다. PEET 공부에 대한 확신도 크지 않았던데다, 공부하던 종목을 바꾸게 되어, 불안감이 들어오는 시기, 그런 시기였다.
갑자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온다.
'지금이 편입시험 원서접수를 받는 시기가 아니었던가…'
한동안 생각지도 않고 있었던 탓이라, 갑작스럽게 긴장감이 몰려온다. 인터넷으로 접속을 해서 확인을 해본다.
이미 서울대와 고려대 원서접수 날짜는 놓쳐버렸고… 오늘이, 성균관대학교 편입시험 원서접수 마지막 날이다.
'나 따위가 무슨… 성균관대라… 괜히 원서비만 버리는 거 아냐'
여태까지 편입시험 준비도 하지 않아 놓고서는, 합격을 바라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그리고 설사 합격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립대학교 학비며, 서울에서 살 생활비를 생각하면, 합격을 해도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리 넉넉지 않은 집안에서 자라온 나에게는 대학교는 그저 국립대뿐이었다.
서울대학교, 그다음이 경북대학교… 실력으로 서울대는 갈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서울대를 제외하면 실제로 내가 갈 만한 곳은 경북대학교뿐이었다. 현실적으로 목표는 경북대학교였으나… 원서를 딱 한 장만 냈다가 떨어지면 그것도 곤란한 상황이고, 시험도 여러 번 쳐봐야 안정이 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기회가 여러 번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기회를 버리고 한 곳만 시험을 치는 것도 뭔가 아쉽다는 느낌이 드니 말이다. 경북대학교 시험은 한참 뒤에 있었으니, 다른 서울권 대학교에서 연습 삼아 시험을 쳐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올라가는 차비며, 그 외에 것들을 다 생각을 해보니, 그 돈과 시간을 지불하면서까지 시도를 해 볼 것인지, 아니면 그냥 기회를 날려버릴 것인지, 고민 아닌 고민이 계속된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 다가온다. 때마침, 명수가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한다. 명수는 의학전문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의사국가고시 시험을 앞두고 있는 동갑내기 친구다.
명수와 같이 하는 점심식사… 딱히 어디에다가 이야기할 곳도 없고, 명수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까지가 성균관대 편입 원서접수 마지막 날인데 원서를 쓰는 게 나으려나?" 내가 묻는다.
"닌 지금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건 다 해봐야 된다." 명수가 대답한다.
다시 점심을 먹고 돌아온다. 계속해서 고민을 하고 있다. 잠시 열람실, 내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잠깐 나가본다. 어차피 혼자서 고민만 하고 있다가는,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기로 했다.
동보 형님에게 전화를 해본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영일 형님에게도 전화를 해본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동보 형님과 영일 형님은 내가 나름 큰 문제가 있을 때 전화를 하는 그런 형님들이다.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와서, 원서접수 사이트만 보고 있다. 여전히… 혼자서 고민 아닌 고민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중이다. 우선 아직은 원서 마감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있으니,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시간이 아까워서, 책을 꺼내서 조금이나마 공부를 시도한다. 하지만, 여전히 집중은 잘 되지 않는다. 다른 곳에 신경이 쓰이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휴대폰이 울린다.
확인을 해보니, 동보 형님이다.
전화를 들고 황급히 밖으로 나가서 받는다.
"그래 강현아. 무슨 일이고? 아까는 내가 바빠가꼬."
"형님 안녕하십니까? 다름이 아니고, 오늘이 성균관대 편입시험 원서접수 마지막 날인데, 이걸 시도를 해봐야 할지 말지 고민 중입니다."
"그래? 오늘까지라고? 일단 원서는 한번 내보지 뭐. 원서 쓰는데 얼마고?"
"네 10만 원 정도 드는데, 서울까지 왕복하는 차비랑 시간 포함하면 더 많이 들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거의 왕복하고 하면 20만 원 이상 든다고 봐야 되겠네. 그래도 원서는 한번 내봐라, 일단 한번 해보는 게 안 낫겠나?"
"그래도, 그게 어차피 떨어질 가능성이 높은 시험인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서비랑 서울 가는 비용은 내가 지완이 형이랑 영일이 형한테 이야기해서 한 번 마련해 볼 테니까 돈 걱정하지 말고 한 번 쳐보자."
"네, 감사합니다. 그럼 우선 원서 접수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성균관대학교 원서접수를 한다. 사실, 전화를 하기 전에도, 정 안되면 혼자서라도 접수를 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 형님들에게 전화를 한 건, 그냥 한번 더 확신을 받고서 원서를 내보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것일 것이다. 아무래도 혼자서 독단적으로 결정을 해서 하는 것과, 그래도 주변에서 한번 해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하는 건 느낌이 아무래도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부터는 당분간 편입시험 준비에 올인을 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편입시험은 작년에 잠깐 준비를 하려 했다가, 학점 계산 실수로 학위를 받지 못하게 되어, 준비를 하려고 하다가 그만둔 게 전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작년에 어차피 자동으로 떨어지는 것이더라도 시험은 한번 가서 봤었어야 되는데… 라는 아쉬움이 들어온다. 하지만, 아쉬운 생각만 해서 될 것도 아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니,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할 수 있는 만큼 준비를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
당장 책을 구할 수는 없으니, 우선 인터넷으로나마 구할 수 있는 아주 오래된 경북대학교 영문학과 편입 시험 기출문제를 한번 풀어본다. 그나마 풀어볼 만한 편이다. 하지만, 성균관대 시험 유형과는 좀 많이 다를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다른 자료를 구할 길이 없으니, 이것으로라도 만족을 해야 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시험 준비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