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가 모습을 드러낼 때 "
A Beautiful Moment
주름진 얼굴에 작아진 눈. 그날따라 해맑은 엄마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녀를 얼마쯤 알고 있을까?
어느 날 나는, 재키 스타일의 부풀린 단발머리,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정장 투피스, 그리고 검정 선글라스를 쓴 20대 그녀의 흑백사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엄마는 충북에서 외할아버지가 사준 옷감으로 양장을 맞춰 입고 친구들과 서울에 놀러 갔었다고 한다.)
그 순간 고착화된 존재(엄마)로 멈춰있던 그녀는 "B.J.(엄마 이름의 이니셜)"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내게 떠올랐다. 조막만 한 흑백사진은 진정 놀고 싶은 언니 60's 잇걸 B.J. 를 담고 있었다.
늙고 애틋한 어미로 규정되어 멈춰있던 그녀가 나'라는 '관찰자'의 우연한 발견에 의해 변화를 맞아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가능태지만 B.J.라는 부캐가 발견되어 재평가받으며 존재감도 상승할 예정이다.
예상치 못한 순간, 기대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존재가 모습을 낼 때
우리는 신비로운 체험을 한 듯 그 대상과 순간을 잊지 못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인왕산 아래 서촌에서 십수 년을 살았던 나는 어느 날 지인이 찍은 인왕산 사진을 보게 되었다.
오가면서 늘 바라보던 산의 얼굴이 눈 오는 날 찍었다는 사진 속에서는 그야말로 만물상이었다.
사람들도 있고 코끼리도 있고 마치 처음 보는 것 같이 생경하였다.
눈 오는 하늘아래 산 전체의 명암이 선명해지며 흐릿했던 제 얼굴이 드러난 것이다.
신비로운 인왕산이라니!
눈 오는 인왕산 모자바위 쪽 풍경, 사진 Oheunsil님 제공존재가 모습을 드러낼 때.
현대미술작가 아이웨이웨이(Ai Weiwei)가 한 말이 생각난다.
오래전 북경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중국인이기에 할 수 있는 엄청난 작품들을 세상에 선보이고 있었고, 국제적인 미술계가 인정하고 작품으로 화제성을 불러오는 만큼 중국 공안의 감시와 제재는 날로 심해지던 때였다.
나는 당시 추진하던 프로젝트에 장소특정적인 작품으로 그와 신작을 계약하는 과정에 있었다.
나는 구체적으로 그가 무슨 작품을 어떻게 사이트(Site)에 설치하고 싶은지 매우 궁금했다.
또한 회사에도 보고를 해야 하니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그를 만나게 되었다.
큰 풍채에 범상치 않은 눈빛,
인상과는 다르게 휘파람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는 나의 궁금증을 응수해 줬다.
조각 피스를 여러 개 만들게 될 것 같다. 투명하고 반짝이는.
그것들은 그 장소에 조응하여 그것들이 알아서 위치를 찾아가고 존재감을 드러낼 거다.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때에 그렇게 된다.
당시 내게는 선문답 같은 얘기였다.
나의 고개는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아이처럼, 그의 휘파람 같은 목소리에 끄덕끄덕했다.
털이 풍성한 고양이 여러 마리가 회의 탁자 위를 깃털처럼 가볍게 살랑이며 오고 갔다.
내가 그들도 회의에 참석하는 것 같다고 하니 살짝 미소띠며 그는 그렇다고 했다.
照應 (비칠 조, 응할 응)
존재가 모습을 드러낼 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비칠 때.
조응에 의해 존재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니 아름답다.
사진 : New Times Oct. 18, 2010 'At Tate Modern, Seeds of Discontent by the Ton' 아이웨이웨이(Ai Weiwei)의 대규모 설치작업 중 , 2010년 영국 테이트모던 터바인홀에서 전시된 작품 [Sunflower seeds]는 수작업으로 만든 도자기 해바라기씨를 1억 개 뿌려놓은 작품이다.
중국 작은 성의 주민들이 참여하여 제작하였고 그 인원이 16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전시 관람자들은 해바라기씨를 마치 해수욕장의 모래처럼 장난을 하기도 하고, 밟고 다니며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관람자에게 밟히는 씨앗, 도자기 해바라기 씨앗이 내는 소리. 존재가 모습을 드러낼 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