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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풍 west wind Aug 18. 2024

"노빠꾸의 세 개의 영어수업"

A Beautiful Moment

나에게 영어공부는 긴 시간 미완의 숙제다.

일이든 일상이든 언어를 꾸준히 자주 써야 한다는 것을 몸소 체득했지만 아직도 그러기가 쉽지 않다.

뭐든 빨리 해냈던 일 습관이 언어에서 만큼은 작동하지 않았다.

지지부진하고 느려터지게 흘러갔던 영어공부 시간은 때론 어드벤처와 우연한 만남을 선물해 주었다.   


때는 1997년 11월 22일 IMF 사태가 터지고 난 직후의 1998년 이른 봄.

가열찬 직진의 삶을 살고 있던 청춘. 직장 일에  빨리 번아웃이 온 나는 회사와 수개월 전에 미리 휴직을 협의한 생태였다. 노빠구! 당시 가격으로 2,000원에 육박하는 미친 환율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획한 어학연수를 위해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뭔가 해외에 나가면 다음 인생 스테이지로 가는 뾰족한 수가 생길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새로운 목표가 필요했던 나는 충실한 실행가였다.

당시는 유학하던 학생들도 한국으로 많이 돌아오고 미국에 한국 유학생이 많지 않았던 시기로, 내가 공부하는 ESL 코스에도 한국학생이 거의 없었다.


캘리포니아의 첫인상은 너무 느슨하고 한가한 것에서 오는 생경함이었다.   

처음에는 한인이 없는 곳으로 가 영어공부만 해보겠다고 서울로 치면 천안 정도 거리에 있는 UC Riverside로 갔다. 가보니 한가한 소도시에서  있을 일이 아니라는 빠른 판단이 들었다. 지루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 한국식품점 하나 없는 곳에서 처음 가져간 엄마표 볶음 고추장이 다 떨어지자 기력마저 떨어졌다.

소울푸드를 찾아 혼자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LA 한인타운으로 김치찌개를 먹으러 갔다 왔다.

치아가 없는 승객들이 많았던 그레이하운드 버스 경험은 내심 두려웠지만 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자신의 고향 네브래스카와 스타벅스(한국에 스타벅스가 들어오기 전이다) 얘기를 많이 하는 선생님을 뒤로하고 빠른 판단으로 UCLA ESL 코스로 갈아타며 LA Westwood로 이사를 갔다.


 1. Westwood  X ESL Course

"그래, 내 여기까지 왔으니 할리우드도 둘러 봐주고 디즈니도 게티뮤지엄도 가주고 즐기면서 공부하는 거야~ "

LA에 연고자가 없는 나는 숙소 구하기든 뭐든 일단 가서 해결을 하기로 했다.

학교 근처의 싼 호텔에서 며칠 머물며 대학 내 게시판을 기웃거렸다. 실링팬이 도는 호텔 룸에는 TV가 없었다. 1층에 공용냉장고와 TV가 있었는데 거실 같은 로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앉아 TV를 보곤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호텔은 인근지역에서 LA에 잠시 일을 하러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이 묵는 호텔이었다.

다행히 3일째 되는 날 운 좋게 조건도 맞고 당장입주가 가능한 숙소를 구하게 되었다.

나는 지역 케이블방송에 다니는 직장인 백인여성과  UCLA에 다니는 Filipino Americans인 여학생과 하우스메이트로 Westwood에서 살게 되었다.

딱 불어지는 스타일의 직장인 언니는 첫날 이불이 없었던 내가 맘에 걸렸는지 일찍 퇴근하여 나를 쇼핑센터에 데려갔다. 리즈시절의 섀넌 도허티를 닮은 예쁘게 생긴 여학생은 학생들 주말파티에 나를 데려가 줬다.

답례에 나는 김밥을 만들어 주었는데, 지금이야 미국에서 김밥이 핫 한 것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정말 미국인들에게는 검은 해조류를 먹는 게 생경하기도 하고, 처음 경험하는 맛의 음식이었던 듯하다.  

그들은 예의를 갖춰 몇 개만 먹어줬다.  기본생활 여건은 제법 갖춰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워커홀릭 관성이 강력해선지 나는 LA에서도 뭔가 다시 열심히 하려고만 했다.

그러다 보니 머리가 뒤죽박죽 영어도 안되고 한국말도 잘 못하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스트레스가 쌓이는지 허리통증도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노란 랜드로버 가죽신발

어느 날, 하루에 몇 번을 오가는 동네 거리를 훑어보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버스정류장 앞에 선 노란 랜드로버 가죽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저 신발을 신은 사람은! 오랜만에 발견하는 한국사람이었다.  나는 넉살 좋게 웃으며 내가 전에 신던 신발과 똑같아 너무 반갑다며 말을 걸었다. 순하게 생긴 여학생은 잠시 놀란 듯하다 살짝 웃으며 말을 받아줬다.

오랜만에 누군가와 참새 방앗간처럼 잠깐의 수다를 늘어놓는 순간이 즐겁고 편안했다.

그렇게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인연은 미국에 연고자가 없는 나에게 주말 한인교회의 한국식 점심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포함하여 현지에서 나의 안부를 물어주는 첫 번째 사람이 되어주었다. 교회에서 나의 포지션은 금세 정리되었다.  유물론자였던 나의 직진 질문에 교회에서 전도는 포기한 듯했고 ㅎㅎ 나는 교회 청년부에 깍두기로 가끔 참여하게 되었다. 명랑하고 살가운 교회 웃언니들로부터 소개팅도 들어왔다. 분위기를 파악해 보니 한인사회가 넓으면 넓고 좁으면 좁은지라 청춘남녀들이 짝을 찾는 게 쉽지는 않은 듯했다. 랜드로바 친구와 웃언니들 그리고 소개팅 남자와 함께 피크닉을 가서 찍은 사진을 최근 집안 구석에 있던 오래된 박스에서 발견했는데 각자의 표정들이 너무 재미있다. ^^ 

그때 소개팅에 성공했다면 미국에 살았으려나?


2. UCLA X Business English Course

매일 넘쳐나는 시간. 아니 이 환율에 뭔가 더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추가로 UCLA 캠퍼스 내에서 진행하는 좀 더 언어가 되는 직장인 외국인을 위한 Business English for Non-native speaker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들었다.

할까 말 까면 하자 쪽인 나지만 역시나 이 프로그램은 나에게는 너무 이른 과정이었다.

좀 더 유창하게 영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네이티브가 아닌 외국인 직장인들을 위한 과정이었다.

들어가 보니 이 과정은 상황과 목표를 제시하고 학생들이 롤을 정해 롤플레이를 하며 토론하는 수업이었다.

다행히 한주 전에 어젠다 정보가 담긴 프린트 물을 주었는데 나는 거두절미 가장 롤이 적은 배역을 스스로 정해 가상의 대화를 예견하고 내가 최소한 할 수 있는 말들을 준비해 와 한두 마디 얘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든 수업은 가장 뒤처지는 나를 배려하며 진행하는 수업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검은진주 알렉스

수업 동료들은 굉장히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었는데, 그중 항상 코믹하고 명랑하게 분위기를 주도하는 콜롬비아에서 LA로 진출한 복서이자 모델, 그리고 팝음악 제작 스튜디오에서도 프리랜서로 근무하는 알렉스가 나를 잘 챙겨주었다.

알렉스는 내가 본 흑인 중 가장 진한 검정색의 그로시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몸짱맨이었다.

그는 긴장하는 수업을 마치면 겨우 안도의 숨을 쉬는 나에게 매번 잘하고 있다고 괜찮다고 어깨를 쳐주었다.

어느 날 그는 내게 마샬, 태권도에 아느냐고 묻더니 - 당연히 알 수밖에 - 나를 선셋 블루버드 대로 모처에서 있 파티에 초대했다. 주소지로 가보니 대략 3층짜리 건물이었는데 도대체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어찌어찌 파티장으로 들어갔다.

알렉스가 "친구들의 파티야 꼭 놀러 와~"라고 했는데... 허걱 스티븐 시걸이 친구일 줄이야.

첼로와 일렉기타의 라이브 연주가 있는 살롱에는 적당히 잘 차려입고 온 힙한 사람들 꽉 차있었고 그 속에 티셔츠 청바지에 모자를 눌러쓰고 온 내가 정말 눈에 띄는 상황이었다.

오~ 알렉스 너 그런 사람이었구나~! 땡큐 ㅎㅎ  


3. Santa Monica X Adult Education Center

알렉스가 있는 전문 영어 과정에서의 고군분투로 인해 나는 말하는 시간을 늘려보기로 했다.

나는 우연히 정보를 얻게 되어 산타모니카 쪽에 있는 Adult Education Center에도 등록했다.

이민자들의 나라답게, 미국은 영어가 잘 안 되는 국민들을 위해 영어를 거의 무료로 가르쳐주는 교육프로그램이 있다. 내가 등록한 곳이 그런 교육을 하는 곳이다.  

거기서 어학연수 차 미국에 온 20대 초반 아시아 친구들의 왕언니가 되었다.


할리우드 엑스트라?

그중 시크한 태국 친구가 있었는데, 태국 유명 방송국에 잠시 근무하다 영화를 공부하고자 LA에 왔다고 했다.

나보다 1년 먼저 캘리포니아에 입성한 그녀에게도 환율 문제가 있었다.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영화과 입학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콘텐츠산업에 대한 공통 관심사로 그녀를 가끔 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녀는 꽤 괜찮은 일당도 있는 할리우드 영화 엑스트라 모집이 있다고  함께 가보겠느냐고 내게 물어왔다.

실행력 갑이 당연히 흥미로운 정보를 마다할쏘냐!

세상에나~ 모집을 하는 에이전시가 가까워지고 있는데 대략 50미터 정도 사람들의 줄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이렇게나 다양한 사람들이 산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남녀노소 온갖 인종과 뚱뚱한 사람 마른 사람 등 사람구경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긴 줄이었다. 백인을 포함하여 미국이 전 세계에서 온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사회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백문이불여일견! 이 줄은 방문접수가 필수인 우리가 가는  에이전시로 향하는 줄이었다.

지루하지 않게 기다리던 줄이 줄고, 내 차례가 왔다. 먼저 담당자가 상반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받아 든 하드카피 서류는 굉장히 긴 질문이 있는 신청서 겸 동의서였는데, 예를 들어 신체 노출이 얼마나 가능하냐에 대한 수위가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고 해당란에 마킹을 해야 했다. 질문지를 읽는 내내 대단히 흥미로웠다. 이렇게 상세하게 질문(촬영과 관련된)하는 신청서를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마킹을 하다 보니 안됨 안됨 안됨 나는 그런 칸에 체크를 많이 하고 있었다.

물론 이후 에이전시에서 회신 연락이 오지 않았다. ㅎㅎ


산타모니카에 수업을 가면 4명이서 자주 어울렸다.  그중 한 여학생샌프란시스코에서 공부는 친오빠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그래~? 고고씽! 우리는 LA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자동차 여행을 하기로 했다.

나는 이 자동차 여행을 계기로 가능한 상황이 되면 지구 대지가 드러나는 선 - 지평선 수평선 산세 -  을 유심히 보기 시작한 거 같다.

시간상 그 아름답다는 캘리포니아 1번 국도가 아닌 고속도로를 선택했지만 차창밖을 통해 낮지만 거대한 산세를 보기도 하고, 멀리서 소 때가 있는 평원도 보며 거대한 아메리카대륙을 느꼈다.

 

샌프란시스코는 LA와는 완전 다른 느낌이었다.


지개 마을 Castro

7시간 정도를 달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도시에 입성하자마자 우연히 Castro라는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거리는 물론 대부분의 집들에 무지개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와~~~ 무지개로 덮인 동네다! 이게 뭔 일?! 우리는 모두 일단 멈춰 이 동네를 둘러보기로 했다.

샌프란시스코는 당시 전 세계 최대의 성소수자 페스티벌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가 멈춰 선 동네는 성수소자들의 마을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Castro.

생전 처음 보는 여장남자들과 온갖 디자인의 과감한 노출 복장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온몸을 불사르는 쇼가 곳곳에서 벌어지는  Castro 정말 해방구 같은 폭발적인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인파 가득한 거리에서 우리는 와~ 와~ 탄성을 지르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나도 모를 알 수 없는 해방감과 자유로운 기분에 가슴이 시원해지고 머리가 쭈뼛 솟았다.   

우리는 노을 지는 금문교를 보기 위해 다시 달렸다. 금문교를 대로 볼 수 있는 스팟에서는 엄청난 바람이 불고 있었다.

LA와 다른 느낌의 샌프란시스코는 청량하게 톡 쏘는 사이다 맛이었다!



조나단 리빙스턴 비둘기

다음날 우리는 여러 관광 스팟을 돌아봤다. 정말 아름답고 볼 것이 많은 샌프란시스코.

Pier39에도 들렀다. 친구들과 함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큼한 빵에 담긴 크램차우더 수프를 먹었다.  맛있다를 연발하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문득 내 눈에 바닷가 데크 주변에 쳐진 난간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갈매기 한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갈매기떼네 하며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다 어랏하고 다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놈이 약간 작고 모양도 이상한 게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나란히 앉아 있는 수십 마리 갈매기 무리 중에 비둘기가 한 마리 끼어 있었다. 보무도 당당하게 마치 자기도 갈매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귀여운 놈이네 하며 웃음이 나왔다. 그 비둘기 얘기를 일행에게 하려는데, 비둘기는 다른 몇몇 갈매기들이 하늘로 비상하자 자기도 갈매기처럼 비상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오~ 조나단 리빙스턴 비둘기!

비둘기의 꿈. 나는 그 장면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한 개의 영어수업이 세 개로 늘어나는 과정에서 느리던 시간이 점점 빠르게 렀다.

어느덧 나는 영어공부를 앉아서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친구들을 사귀고 놀고 있었다.

그러자 한글과 영어로 뒤죽박죽 엉키던 머리도 정리되고 영어도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에너지가 꿈틀 올라오기 시작했다.

세 개의 영어 수업이 하나씩 하나씩 끝나갈 즈음 나는 휴직한 회사 대표님께 국제전화를 했다.


"사장님~ 저 다음 달에 회사 출근하려고요. 비행기표 사게...보내주세요~~ 헤헤"




1998, 노빠꾸의 세 개의 영어수업은 계획대로 된 것이 없지만 계획에 없던 우연과 인연으로 생각지 못한 즐거운 경험을 선물 받았다.

가끔 캘리포니아에서 만났던 인연들이 찐하게 기억난다.

그중 미안하게도 얼굴은 또렷한데 이름을 까먹은 친구도 있다.

나에게 이런 추억을 만들어 준 그 시절 캘리포니아 인연들이 보여준 친절과 우정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국에서 혈혈단신이었던 내가 노빠꾸로 순간순간 헤쳐나가고 인연을 맺고 안전하게 살다 떠나올 수 있었던 행운에 감사한다.


다시 노빠꾸의 삶을 시작해보련다.


나의 삶은 도움 받은 게 많아서 가능한 한 순간순간 많이 베풀어야 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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