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misunderstanding to understanding
(오늘의 글엔 BGM이 필수란 생각에 추가합니다. 제가 화를 내는 걸 예방하기 위해 틀어두는 곡 중 하나에요. 애들 재우는데 도움이 되는 곡 찾다가 발견한 작곡가인데, 전 드뷔시 곡 들으며 화를 내기 어려운 것 같아요. 동영상은 없고 음원만 있습니다. 최애곡은 Clair De Lune 입니다.)
*커버사진의 장소는 서울숲 한구석에 있는 대나무숲입니다. 비가 왔다리 갔다리 한 날이라 유난히 푸릇푸릇해서 찍었네요*
육아를 하면서 공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런 저런 철학 비스무리한 것들과 원칙들이 생겼다.
아이들의 미디어 노출, 가공식품에 관한 태도 등과 관련해서 철저히 지키려고 하는 것들이 있다.
이런 나의 의견이 의도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드러날 때, 다른 의견을 가진 부모가 불편해질 수 있는 순간을 자주 마주한다.
- 내가 만2,3세 우리 아이들에게 핸드폰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면, 유모차에 핸드폰 홀더를 고정해놓고 쇼핑몰에서 다니는 부모는 ‘그럼 우리는 잘못하고 있는 거네요?’ 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과자, 사탕을 안 준다고 말하면, 친분 있는 사람들은 ‘어차피 엄마 아빠 품 떠나면 다 먹어’ 라고 말한다.
- 육아기록을 적은 글들 중, 우리는 산후조리원에 안갔어요 - 라고 썼던 글을 내린 이유도 누군가에게는 그게 불편하게 다가갔을 수도 있겠다는 자각에 의해서이다.
- 만약 내가 ”아이들을 키우는 건 부부 둘이 함께 해야 견딜만할 정도로 힘든 일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하면, 또 ‘돌싱’맘, ‘돌싱’파더들의 마음이 불편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주장은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잠재성이 존재한다.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면 아무 주장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가끔은 질문을 받고 아무 대답을 하지 않으면 그 역시 질문자에게 상처를 줄 수 있으니, 의사표현은 하던 하지 않던 늘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건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일수 있겠다.
난 아마 태생이 의심이 많은 성향의 아이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까? 3학년이었을까? 기억 속의 여름성경학교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 누굴 닮았다고 생각하는가?”
난 무려 도마라고 대답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이유는 의심이 많아서.
누군가 내게 “의심은 나쁜가?” 라고 묻는다면 정도에 따라서 사람을 지켜줄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도구라고 대답할 거다.
200%수익을 보장한다는 투자권유부터 보이스피싱, 사이비종교까지 ‘합리적 의심’ 없이우리는 ‘안전하게’ 살아갈 수 없다.
이 글의 핵심은 종교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예시로서 효과가 있을 것 같아 사용한다.
종교가 없는 누군가가 종교는 ‘의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한다면, 난 그건 방향성의 문제라고 말하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기존 포지션, 기존 세계관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게 당연하다.
누가 자신의 세계관을 흔드는 질문을 달갑게 받아드리겠는가?
근데 질문을 어느 쪽으로 던지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왜 신이 없다고 의심 하지 않는지?
vs
왜 신이 있다고 의심하지 않는지?
확증편향은 양쪽에 존재한다. 그게 공평한 평가이다.
기독교에서 의심은 ‘죄’인가? 그건 단순한 해석이라고 답변하겠다.
만약 창세기 이야기에서 하와가 ‘선과 악을 구분하는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권유한 ‘뱀’을 의심했다면?
의심의 방향이 중요하다.
믿을만한 존재를 믿어야 한다.
성경 이야기 속 모세라는 인물도 감히 신에게 의심을 가득 가지고 질문을 던진다. 믿음을 위한 근거로 많은 기적을 보여준다.
이런 패턴은 신약 성서의 예수의 이야기에서도 나온다.
많은 기적을 보여준 건, 자기가 누군지 믿게 하기 위해서 라는 이야기가 있다. 믿을 만한 근거를 제시하고 믿으라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토론이랑 형식의 콘텐츠를 5-6년 시청해오면서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으로서 위 기독교에 대한 내용을 적었다. 하지만 만약 이 글을 읽는 누군가의 삶 속에서 경험한 기독교인이 정말 최악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다거나, 성경의 무슨 이야기를 읽고 자기 절의 불상을 부쉈던 자칭 ‘기독교신자’를 경험한 불교신자라면 기독교의 예화를 든 것 자체에서 이미 심기가 불편해지며 ‘나무아비타불’을 읊조렸을 지도 모르겠다.
같은 텍스트를 마주하더라도 듣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의 삶, 개인적 경험이 미치는 영향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한 때 좋아했던 철학자 버트런트 러셀은 어떤 토론에서 ‘진정한 의미의 회의론자는 존재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한 적 있다.
(정확히 인용하자면 심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Skepticism, while logically impeccable, is psychologically impossible, and there is an element of frivolous insincerity in any philosophy which pretends to accept it.
-Bertrand Russell, <Human Knowledge: Its Scope and limits>
그 어느 ‘회의론자’도 무엇을 의심할 지 한 쪽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반대편에 대한 의심을 하는 것이라는 본질을 꿰뚫은 말이다.
매거진 <스켑틱 Skeptic>의 마이클 셔머와 그에게 영향을 받은 많은 ‘회의론자’들은 과학주의적 입장에서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의심을 하고 모두가 그런 합리적인 의심을 가져야 한다고 권장한다.
하지만 상대주의적인 입장으로 카운터를 날리자면 ‘그건 자기 세계관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한 의심 아닌가요? 왜 그 입장에 대한 의심은 하지 않나요?’ 질문을 해볼 수 있겠다.
마이클 셔머는 우주의 기원에 대한 해석을 위해 ‘무로부터 시작된 우주’ 라는 이론을 제안하는 듯 하지만 사실 그가 주장하는 ‘무’가 우리가 생각하는 ‘아무 것도 없는 nothing’이 아니라는 것도 아이러니.
우리는 부득이하게 어느 관점, 어느 입장에서 반대편 입장에게 의심을 던진다. 피할 수 없는 구조이다.
’아, 그래도 객관적으로…… 상식적으로……’ 로 시작하는 반론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가?
잘 생각해보자.
누구나 아는 지식을 뜻하는 ‘상식常识’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사람의 상식이 다르고, 미국 사람의 상식이 다르다.
남자의 상식이 다르고 여자의 상식이 달랐다.
초등학생의 상식과 대학생의 상식은 다르다.
기혼자들의 상식과 미혼자(?)들의 상식이 다르다.
상식은 사실, 상대적인 지식이다.
(相识라는 한자로 대체하고 싶다)
”객관적으로“ 라고 말하고 싶은 건, ‘내가 옳다’ 라고 말하고 싶은 자기 기준에서 하는 말이다. 조금 기분 나쁠 수 있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그건 ‘자기 중심적’이라는 거다.
부부싸움에서 가장 ‘저단계low-level’의 불화의 씨앗이 바로 그 ‘상식’이란 단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니, 상식적으로 누가 그렇게 해?!’
이렇게 불만을 표하면 부부상담을 하는 상담가들은 이렇게 말할 거다.
‘그건 자라오신 가정에서의 상식이고, 배우자 분께서 자라온 가정에선 다른 ’상식‘을 가지고 있었죠.’
결혼 초기 부터 그걸 이론적으로 알고 주의하고 있었지만, 가끔은 그게 ‘반응적으로’ 나와서 실수를 하기도 했다.
자, 그럼 ‘객관적으로‘ 라는 말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본다. 신이 없다면 객관성도 없다.
인간은 늘 이해利害관계에 귀속된다.
자기중심성을 벗어날 수 없다.
한국인이 ’객관적으로‘라고 말한다면, 그건 ’한국인으로서의 상식‘에 어필하고자 하는 것이고, 중국인, 일본인, 미주, 유럽의 다른 국가 사람들에겐 통용되지 않는다.
객관客观. ’손님 객客‘ 이라는 단어에 집중을 해서 풀어본다면, 주인이 아닌 손님의 입장에서가 된다. 인간이 객관적으로라고 말하려면,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나 비인간적 초월적 존재의 입장에서란 이야기가 된다.
객관적인 선과 악.
절대적인 정의.
이 모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게 아닌 이유다.
나치가 잘못했다고 말하려면, 인간의 기준이 아닌 절대적 기준의 개념을 들이대어야 한다. 그게 없다면, ’국가 A’ 와 ‘국가 B’의 가치관 차이, 이해관계 차이로만 해석해야 하고, ’차이‘는 ’옳고 그름‘의 관점이 아니다.
원래 이번 주는 휴재를 예고했다.
첫째 아이, 사야 (가명)의 생일이 있는 주간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내가 브런치를 하면서 마음을 온전히 가족에 쏟지 못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인간의 주의력, 집중력, 체력, 정서적 에너지 모두 유한하다.
X라는 양에서 나누기와 빼기를 하며 분배를 하는거다.
독자의 댓글에 대댓글을 달아주겠다는 사명감을 가진 구독자 100명이상, 1000명 이상의 작가님들이 지닌 무게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작가의 글에 대해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많을까.
구독자 수가 얼마 되지 않는(? 사실 지금의 숫자도 과분하다)나에게는 작가님들이 댓글을 남겨준다는 자체가 내포한 의미를 알기에 너무 감사하고 즐거울 뿐이다. 하지만 OOOOOO 작가님이나 OOO 작가님 수준이 되면 난 일일히 성의있는 댓글을 달 수 있을까? 의문이다. 애들 다키우고 나서 ? 초등학교에 보내고 나서? 하루에 1시간씩 할애해서?
그런 다양한 사람들이 남긴 댓글에는 분명 미성숙한 자아와 왜곡된 시선(이라고 불러 마땅한)으로 오해나 곡해가 담겨 있을 수 있겠다. 댓글을 쓰는 사람의 절대수량이 늘어날수록 그럴 확률이 올라간다. 이건 챗GPT알고리듬을 댓글모니터링에 적용시켜 모든 사용자의 댓글에서 부정적인 단어나 뉘앙스를 탐지해서 사전차단을 하는 기능을 적용한다고 해도 막을 수 없을 현상이다.
자, 그런 확률이 올라간 상태에서 ’미성숙한 독해력‘과 ’미성숙한 표현력‘을 가진 누군가가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의 글에 달린 댓글에 댓글을 남기는 일이 발생했다.
난 앞뒤 문맥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표현 하나만 알고, 한껏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덤벼들었지만, 뒤늦게 앞뒤 문맥을 읽어보니, 댓글을 단 사람은 스스로도 자신의 의도를 ’공격성‘, ’적의‘를 인정했다.
그는 아무도 스스로에게 부여하기 어려운 ‘정의의 심판‘의 자격으로 작가와 독자와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의도를 가지고. (편의상 나는 이 스토리에서 미성숙한 댓글의 작성자를 나는 악당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무리 ’행복 히어로‘가 출현하여 아무리 ’선하게 해석하기 렌즈‘를 착용하고 합리적인 사과를 유도하려고 해도 그 댓글의 작성자는 또 다른 상처의 소지를 남기는 자기합리화로 뒤덮인 설명을 했을 뿐이다.
Ambivert INFTPJ의 혼란스러운 MBTI의 소유자인 나는 아내에게‘공감력이 부족하다’고 매도당한다. 하지만 그런 내가 봐도 저 댓글 작성자님께서는 선을 넘었다. 그 분께서 어떤 삶을 살아왔고 댓글을 남겼을 당시에 어떤 일을 겪고 어떤 심정이셨을지 모르겠지만,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싶다는 의도를 가졌을 때, 그건 표현의 자유의 선을 넘은 거다.
이 서사구조에서 3명의 등장인물을 정리해본다.
(1) 많은 독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상처받지 않았으면 응원하던 대상의 작가가 피해자로 있다.
(2) 단순하게 분석한 내 관찰자의 시점에서 악당은 확인되었다
(3) 그 악당에게 사과를 시키려는 히어로도 확인 되었다.
악당이 어떤 성격의 작가인지 궁금하여 검색을 해보니 나오지 않는다. 분란을 조장한 것을 깨닫고 자책감에 탈퇴한 걸까? (그 정도 정서적 공감력이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미성숙한 커뮤니케이션의 대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피해자'와 히어로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흐른다.
히어로도 감정이 상했고, 담담한 어조라 얼핏 읽었을 때 감지 하지 못했던 '피해자'의 감정선에도 먹구름이 깔려있었던 거다.
위 악당 때문에 서사구조상 히어로와 피해자라고 표현했지만, 내 마음 속에서 둘 다 히어로이다. 두 분 다 각자의 삶 속에서 마주하고 있는 고통을 이겨내며 꿋꿋이 살아가고 있는 승자이기 떄문이다. 이런 나의 히어로 사이에서 천둥번개가 치고 있다고 생각하니 엄마 아빠가 싸워서 마음이 불편한 아이의 심정이다. (나의 부모님이 자주 싸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하, 성별을 나누어 히어로와 히로인으로 명칭을 구분하겠다.
난 원래 다른 사람들이 쓴 댓글을 읽는 건 뭔가 남의 대화를 엿듣는 것 같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래서 히어로와 악당의 대화에도 주목하지 못했다. 히어로와 히로인의 대화도 마찬가지.
대학생 때, 담화분석discourse analysis란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위 상황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런 분석기법을 적용하여 위 스토리의 담화를 분석할까 생각하다가 너무 직접적인 분석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남길 것 같아 나의 글에 녹이기로 했다.
난 두 작가님의 독자이다. 두 사람을 꽤 진지하게 응원한다.
두 사람을 만난 적은 없지만 글을 통해 만난 두 사람의 자아는 색깔은 다르지만 ’같은 편‘이다. 둘 다 서로에게 ’악당‘도 아니고, 서로 대립되는 이념의 소유자도 아니다. 드러나지 않은 대화나 내가 놓친 디테일들에서 어떤 상처와 오해가 생겨났는지 난 모른다.
모르면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오늘은 아침 9시에 집을 떠나 두 아이를 데리고 서울숲에서 시간을 보내고 저녁시간이 되서 돌아온 하루이다. (아내는 막내와 집에서 휴식) 애들을 씻기고 재우고 뻗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잠든 나를 아내가 깨웠다. 씻으라는 배려. 샤워를 하며 생각해보니 이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 글을 쓰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이 상황 전개에 푸르른 반전이 있길 바라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나의 히어로는 ’히로인‘의 시낭송을 들어봤을까..?
군복무시절, ’멍청해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인터넷서점에서 할인률이 어마어마하게 적용된 영어 소설이 있어서 구매했다. 무려 트와일라잇 시리즈였다. 뱀파이어 스토리엔 관심이 하나도 없던 나였지만, 충동구매였다. 그리고 휴식시간에 누군가 틀어놓은 영화채널에서 소설 원작의 영화가 나왔다. 그 후, 책을 읽을 때마다 극 중 캐릭터들은 배우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목소리는 텍스트가 담지 못하는 뉘앙스와 분위기를 담아 나른다.
텍스트로 전달된 메시지에 음성을 입혔다면 전달력이 더 올라갔을까?
오해의 가능성은 낮아졌을까?
히로인의 (잔잔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가 전한 메시지를 읽었다면/들었다면 히어로 마음 속엔 불이 피어나지 않았을까? 천둥번개가 잠잠해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산만하고 긴 나의 글들, 그리고 종종 분란의 소지가 있는 의견을 피력할 때 오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그래서 생각한 게 내 글을 직접 읽어서 음성 지원을 하는 거였다. 비록 아직은 아내와 애들이 자는 시간 밖에 녹음할 시간이 안나는데 …… 중얼중얼 글 읽는 소리에 네 명 중 하나가 깨면, 누가 깨도 좋은 소리를 못 듣기 떄문에 시도를 못하고 있다.
악당은 사라졌다.
그런데 나의 히어로와 히로인만 남아 서로 아파하고 있다.
서로의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오해가 있지 않을까?
아니, 서로 마음 속에 오해가 많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해가 다 풀려서 화해로 이어지면 좋겠다.
내 생각에 상대방의 잘못이 95%이고 내가 5%라면, 그 5%에 대해 먼저 사과할 것.
(상대는 반대라고 생각할 확률이 높다) 그럼 상대도 자신의 ’5%‘에 대해 사과할 가능성이 생긴다.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사과를 먼저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과를 하는 건 이기는 거일 수 있다. 나의 불완전함에 대한 인정과 관계 개선에 대한 도전이며 그건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서로 신뢰하는 부부 사이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내용을 100% 적용가능한지는 모르겠다.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해석을 했을 가능성에 대한 의심. 상대방에게 선의를 가정한 후 해석할 수 여지는 없을까.
두 사람의 관계가 개선되길 희망하며 글을 맺는다.
브런치에 남을 가치가 있는 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은 전해지길 바란다.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 부디 평안을 회복하길 바라며
02:10 06/16/2024
ICEBERG
주제넘은 글이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 의중은 평화를 희망하는 것이었지만 “어른들의 사정“을 다 모르는만큼 누군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면 “.” 마침표 하나 남겨주셔요. 삭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