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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인아 Oct 19. 2022

상담일지: 나를 거절해주세요

2022-10-19

오늘 상담에서는 경계의 분명함에 대해 다루었다. 상담의 경계를 분명하게 해주는 경험은 나에게 정말 소중하면서 생생히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였다.

나는 나를 거절하면서도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보석보다도 소중하고 간절했다.


메일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

(나의 선생님은 상담에서 다루고 싶은 내용을 기록하는 용도로 메일을 활용하도록 허용하여왔다.)

상담시간 50분을 확실하게 지키겠다고 하는 것.


지금껏 지켜지지 않아 왔지만 언젠가는 지켜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고 마음 한편으로는 지켜지기를 바라면서도 경계의 불분명함을 쥐고 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더 가까워질 수 있고 그래야 내 결핍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계의 불분명함의 대가는 혹독했다.

메일에 대한 목마름이 가실 줄을 모르고, 플래시백의 괴로움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쉬지 않고 상담을 갈망했다. 상담하는 날만 목 빠지게 기다리는 내 눈덩이처럼 커져가는 마음을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워져만 갔다.

나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부디 선생님이 경계를 알려주기를, 나를 거절해주기를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 마음이 가닿았을까.


분명해진 경계가 유기 공포를 또다시 불러일으켰지만 지금까지의 경험과 상담 회기들을 발판 삼아 상대의 분명한 경계가 나를 밀어내고 떠나는 신호가 아닌 건강하게 내 곁에 머물기 위함임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기억하려 무던히도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기억으로 돌아가 대뇌가 편도체에 납치되어 버릴 때면 이미 버림받은 사람처럼 이 세상에 혼자가 된 듯 패닉에 빠지곤 한다. 여전히 온몸이 떨리고, 한곳에 쏟을 집중력을 전부 앗아갈 만큼 트라우마가 그 자리에 있지만, 상담받기 전보다는 편도체의 납치로부터 벗어날 발버둥의 힘이 조금은 길러진 것 같다.


상담의 정확한 시간을 지키고 일주일간에 온전히 나 홀로 정서조절을 하며 지내는 것이 참 오랜만이라 낯설고 조금은 적응의 기간이 필요할 듯하다. 그래도 낯설지만 새롭고 더 건강한 경계를 배우기 위해 필요한 시간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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