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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인아 Nov 15. 2022

상담일지: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

2022-11-14

이번 회기는 저번 회기에 다 다루지 못한 기억 작업을 했다. 나를 공포에 질리게 한 상황과 관련된 기억들을 모두 다 꺼내보는 시간이었다. 목놓아 울고 10살 아이가 되어 울었다. 탈수가 올 때까지, 입의 침이 다 마를 때까지.


나는 싫은 걸 싫다고 말할 때 공포에 질린다.

그 원인 중에는 나의 거부 의사를 언제나 묵살하는 가족이 가장 큰 원인이다.


한번 싫다는 그냥 허공으로 흩어진다.

두 번, 세 번, 열 번을 말해도 본인들이 나에게 주입하고 싶은 좋음은 끝까지 들이 밀고야 만다.

본인이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서 나를 그 앞에 앉히고 싶어 하고

본인이 몸에 좋다고 생각하는 영양제를 내 입에 욱여넣어야 직성이 풀리고

나의 의사는 묻지 않은 채 나의 밥그릇에 내가 좋아하지 않는 식재료를 때려 넣고

본인 눈에 내 책상이 깨끗하기 위해 내가 마음에 들게 정리해 놓은 배치를 망가뜨린다.


그렇게 수십 번 수백 번을 싫다고 말하는 나는 온몸의 근육이 싫음을 표현하도록 트라우마 스트레스가 가로 새겨진다. 그 스트레스의 힘은 마치 소의 사후강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 더불어 그 역치를 넘을 때면 무기력과 저각성이 나를 지배한다. 힘을 주는 방법을 모르는 맹수에게 물린 축 쳐진 사슴처럼.


그런 나는 수많은 경험이 해소되지 못한 감정들과 쌓여버려 '싫다'는 의사표현을 해야 하는 상황이 센서에 감지되자마자 공포에 질린다.

집에서 가장 어두운 장소에 가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눈을 감고 잔뜩 웅크린 채 나를 진정시키고 싶어 한다.

아무도 의지할 수 없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게 가장 가까운 가족이기 때문이다.


가족에게 상처 받은 아이인 채로 몸만 자란 나는 학교 내 괴롭힘의 표적이 되고, 스토킹을 당하며, 친척이 내 몸을 만져 불쾌해도 싫다 말하지 못해 끊임없이 트라우마를 양산하고 만다.


지독히도 아픈 상처를 선생님과 함께 열어서 약 바르고 꿰매고 봉합이 잘 된 회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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