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벗 Nov 08. 2022

뭘 그릴까

올해도 달력을 만들고 싶어서 올해 그린 그림들을 뒤적였다. 숱하게 그렸는데 마음에 드는 그림이 좀처럼 없다. 그림 실력보다 눈높이가 더 빨리 높아져서 그렇다는 말이 위로가 된다. 나 자신에게 조금만 너그러워지면 사실 넣고 싶은 그림이 훌쩍 늘어난다. 이 그림도 그런 그림이다. 올 5월에 그렸다. 조금만 더 잘 그렸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지금 그대로 보아도 흡족한 느낌이 든다.

그림은 안방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다. 요즘 지은 집들은 창이 벽면 높이의 반을 넘게 차지하도록 큼직하게 나있지만 내가 사는 집은 1960년대에 지은 집이어서 침실 창문이 천장 쪽에 가깝게 나있다. 프라이버시 보호 차원에서는 좋은 면도 있지만 발꿈치 들고 목을 쭉 빼지 않으면 창밖을 시원하게 보기 어렵다.


창밖으로는 우리와 뒷마당 울타리를 공유하는 집들, 그리고 그  맞은편으로 늘어선 주택가가 보이고 멀리 나지막한 산도 보인다. 그런데 지극히 평범한 이 풍경에 나는 내내 마음이 끌렸다. 기와를 얹은 지붕마다 솟은 벽돌 굴뚝, 마음대로 뻗은 나뭇가지, 뾰족뾰족하고 누르께한 침엽수들은 솔로 주인공 감은 아닐지 몰라도 함께 조화로운 장면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고기를 앞에 두고 군침 흘리는 개처럼, 이 창 앞에서 1년 동안 군침을 흘리다가 마침내 침대 위에 올라서서 스케치를 했다. 물론 사진을 찍어서 보고 그리면 좀 더 수월하겠지만, 일단 사진을 찍고 나면 사진이 시원치 않아서 그리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질 때가 많다. 푹신한 침대 뒤에 올라서서 그리는 자세가 꽤 불편해서 덤벙덤벙 그렸는데 의외로 마음에 드는 그림이 되었다. 가장 앞쪽에 보이는 레몬나무는 우리 마당에 있는 나무다.


마음을 홀딱 뺏긴 장면을 그렸다가 실망스러운 그림에 그치고 말았을 때 그 장면을 내가 훼손한 듯한, 더 솔직하게는 내 마음속에서 살해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든다. 아마추어 그림은 망치는 게 일상인데 살해까지 운운하는 건 너무 오버하는 걸까? 어쨌거나 장면 살해의 부담감 때문에 요즘은 드로잉과 붓터치 연습으로 스케치북을 채워가고 있고, 그림으로 완성할 때는 며칠에 걸쳐 쉬엄쉬엄 그린다. 그래도 모든 그림이 아쉬움 범벅이지만.


다행히 반대의 경우도 종종 일어난다. 내가 본 것과 사진처럼 똑같지는 않더라도 내가 느끼고 표현하고 싶은 장면을 비슷하게 표현해 냈을 때 느끼는 기쁨은 진하고 소중하다. 아주 어쩌다 만나는 그 기쁨 때문에 또 그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페인 여행 그림 전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