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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by 글벗

큰아이가 우리 곁을 떠난 지 7년이 되어갑니다. 아이가 장난치고 떠들던 모습이 여전히 제 머릿속에는 생생하여, 아이가 곁에 없다는 것을 아직도 실감하지 못합니다. 아이를 보내고 어떻게 사냐고 종종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마도 아이가 없는 걸 실감하지 못해서 살 수 있나 봅니다.


아이 덕분에 저는 참 행복한 엄마였습니다. 언젠가 동생이 오빠를 놀렸습니다. 자신이 어리고 귀여워서 엄마가 자신을 훨씬 사랑한다고요. 열네 살 오빠는 점잖게 대답하더군요.

“그래도 엄마가 처음으로 사랑한 아이는 나야.”

그 말을 들었을 때, 이 녀석이 엄마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싶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아이는 세상만사 귀찮아하던 무심한 저에게 엄마가 되는 기쁨을 알려주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수업 시간마다 '오늘도 학교에 괜히 와서 이 지겨운 수업을 듣고 있구나'하고 후회하곤 했습니다. 심지어 “뽀뽀뽀”가 끝나고 9시가 넘어 등교한 적도 많습니다. 우편으로 오는 성적표는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렸다가 몰래 낚아채 구겨 버렸고, 선생님의 작은 꾸중에도 서럽게 울어습니다. 예방주사 맞는 날, 교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선생님을 발로 차며 울기도 했습니다. 싫거나 두려운 일은 어떻게든 피하려는 버릇은 직장에서도 이어져, 인근에 살던 부장님이 지각대장인 저를 아침마다 차로 태워다 주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무런 꿈이 없었고, 그저 악어가 되고 싶었습니다. 물에 둥둥 떠다니다가 먹이가 나타나면 가끔 사냥하고, 한 번 먹으면 며칠 동안 소화하며 쉬고, 골치 아픈 무리 생활도 하지 않는 악어의 삶을 동경했습니다. 그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인생이 나에게 준비되어 있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는 게 귀찮지?"

누군가 제게 이렇게 물었다면 주저 없이 대답했을 겁니다.

"응. 정말 귀찮아."


그런 제가 어떻게 청소년기를 지나고, 대학을 그럭저럭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기를 가질 생각까지 했는지는 미스터리입니다. 사실, 아기를 낳는다는 일이 도망갈 구멍이 없는 일이라는 걸 분만대에 오르고 나서야 실감했습니다. 열두 시간째 진통 중에 간호사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아기 머리가 골반에 끼어서 호흡을 안 해요. 산모 골반이 좁아요. 수술해야 하지 않을까요?"

의사는 먼저 흡입컵 분만을 시도하겠다고 했습니다. 분만대 옆에 변기 진공컵을 닮은 도구가 눈에 보이고 남편에게 흡입분만의 위험성을 고지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순간, 진통 중에도 정신이 번뜩 들었습니다. '아기를 위험하게 할 순 없어!' 나에게 있는 줄 몰랐던 힘이 솟아나고,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아이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저는 악어가 아니라 엄마가 되었습니다.


제 몸에서 나온 아이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예뻤습니다. 작은 아기를 들여다보며 생각했습니다.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겠어. 넣을 수만 있으면 넣고 다니면 좋겠는걸.'

깔깔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를 듣기 위해 아이 앞에서 재롱을 부리고,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빛을 보기 위해 어디든 데리고 다녔습니다. 외출하면 항상 그 작고 말랑말랑한 손으로 엄마 손을 꼭 잡고,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쉴 새 없이 떠들고, 조그만 눈을 번뜩이며 장난거리를 찾는 아이. 심지어 안 되는 일을 설명해도 떼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한 아이. 아들은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으며, 흠 많은 저에게 이렇게 완벽한 아이가 온 것에 감사했습니다.


아이는 똘똘이 스머프처럼 재잘거리기 좋아했고, 중학생이 되어서까지 잠들기 전에 동생에게 책을 읽어줄 때 옆에 앉아 함께 들었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사춘기가 되면 말수도 줄고 징그러워진다고 하던데 도대체 넌 언제까지 이렇게 귀여울 거니? 하지만 제 마음 한구석은 걱정으로 가득했습니다. 무엇보다 친구와 어울리지 못하는 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아들도 저처럼 키가 작았는데, 사춘기가 되어도 2차 성징만 나타날 뿐 급격히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 밖에도 어린 시절 저를 괴롭혔던 문제들이 아이에게서 보여 하루하루가 불안했습니다. 저보다 훨씬 속이 깊고 머리가 영리한 아이라 더 걱정이 되면서도, 제가 그랬던 것처럼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면 위기는 지나갈 거라고 막연히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반, 대학 지원서를 준비하던 어느 날, 아이는 갑자기 무대에서 내려갔습니다.


발버둥 쳐도, 무릎 꿇고 빌어도, 울부짖어 기도해도, 그 무엇을 해도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절망이 그런 것이더군요. 펄펄 끓는 기름 대신 혼란과 죄책감에 튀겨지는 지옥 같았습니다.


지옥의 어둠에 적응하고 눈에 들어온 세상은 너무 낯설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자살 유부모의 삶은 도망치고 싶을 만큼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열두 살에 오빠를 잃고도 의연하게 나를 바라보는 딸이 있었고, 함께 슬픔을 견디는 남편이 있었고, 절망의 순간에 곁에 있어 준 고마운 분들이 있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낯선 삶을 소중히 붙잡기로 했습니다.


이야기는 아이의 마지막에서 시작하여 남은 부모로서 겪어야 하는 순간들을 다루지만, 많은 부분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제 내면을 괴롭히던 문제를 마주하는 여정의 기록입니다.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하지 못하고 떠난 아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입에 올리기 어려운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아이의 짧은 삶에는 빛나는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냥 잊히기에는 너무 아름다워서 세상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혹시라도 제 이야기를 읽고 누군가가 위로를 얻을 수 있다면, 단 한 명이라도 무고한 죽음을 막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아이가 살았음을 기억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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