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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2020년에 쓴 2018년 그날의 기록

by 글벗

하루 전날


삶은 평온하고 괜찮아 보였다. 남편 직장에서 한동안 구조 조정으로 들썩거리긴 했어도 다행히 남편은 레이오프 대상이 아니었다. 며칠 전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중견기업의 임원직 채용 제의까지 받아 수락 여부를 행복하게 고민 중이었다. 둘째인 딸아이는 동네 외교관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사교적이고 쾌활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시작한 배구에 재미를 붙이더니 학교 배구팀의 리베로 포지션으로 맹활약 중이었다. 나는 그 무렵 기업 소송을 전문으로 하는 7년차 번역가로서 에이전시 몇 곳에서 안정적으로 일감을 의뢰받고 있었고, 아이들 학비에 좀 더 보탬이 되고 싶어서 그해 봄에 부동산 공인중개사 자격을 취득하여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반인 아들은 한국의 수학능력시험과 비슷한 ACT 시험에서 며칠 전 만점을 알리는 축하 통보를 받았다. 미국 대학 입시는 여러 대학에 지원할 수 있어서 모두 불합격할 위험은 낮지만, 대학마다 지원서 마감일이 다르고 요구하는 에세이 주제가 제각각이어서 준비가 까다롭다. 미국에서 공부한 적이 없는 우리 부부는 아들의 학과 선택과 지원서 제출을 그 분야 경험이 있는 지인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한발 뒤에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틀 전에 그 지인에게 연락이 왔었다. 지원할 몇몇 대학의 에세이 마감이 코앞인데 아들이 써야 하는 에세이를 쓰지 않고 있다는 거였다. 걱정이 되어 아들에게 얼마큼 썼는지 보여만 달라고 하니 이제 쓸 거라면서 대학 입시가 마무리 된 후에 보여주겠다며 말끝을 흐렸다. 아이의 답변이 석연치 않아 마음이 복잡하면서도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뭔지 알 수 없었다.


이날 딸은 방과 후에 다른 친구와 카풀을 하여 집에 가고, 나는 아들만 학교에서 픽업하는 날이었다. 학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들을 기다리는데 잠재 고객에게 전화가 걸려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통화 중에 아들이 와서 차에 타도록 문을 열어준 뒤 나는 고객과 통화를 계속 이어갔다.

"아휴"

아들이 큰 소리로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서둘러 전화를 끊고 아들을 나무랐다.

"엄마 전화할 때 좀 조용히 할 수 없었니?"

"내가 뭐얼?"

"엄마가 클라이언트와 전화하고 있는데 그렇게 크게 한숨 쉬면 상대편한테 다 들리잖아?"

"내가 뭐라 그랬다고?"

좀처럼 성질내는 아이가 아닌데 뜻밖이었다. 아들의 어두운 표정에 말씨를 누그러뜨리고 물었다.

"참, 성적 증명서는 픽업했니?"

"아직 안 되었다고 내일 픽업하래"

"그래, 그러면 내일은 꼭 픽업해"

집까지 가는 내내 둘 다 아무 말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그날은 내가 자원봉사하는 단체의 행사를 앞두고 준비팀 회의에 가야 했기에, 미리 식사를 마련해 두고 싶었다. 전날 먹던 닭백숙에서 뼈를 발라내고 닭살을 잘게 찢은 뒤, 야채를 썰어 넣어 닭개장을 끓였다. 식사 준비를 거의 마쳤을 즈음, 딸이 밖에 놀러 나가겠다고 말했다.


"나가서 놀고 올게."

"엄마가 여섯 시에 약속이 있어서 잠시 후에 나가야 하거든. 그전까지 꼭 들어와야 해"

"응, 십 분만 놀고 들어올게"

"어디에서 놀 건데? 너 안 들어오면 엄마가 부르러 갈게."

"세라(가명)네 집 앞에서 놀 거야"

세라네는 바로 건너편 집이었다. 십 분만 놀고 들어오겠다고 한 아이는 십오 분이 지나고 삼십 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여섯 시가 넘으면 금방 어두워질 텐데 슬슬 걱정이 되었다. 세라네 집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라네 집 문을 두드렸다.

"너희들 같이 놀지 않았니?“

딸이랑 같이 놀다가 자기는 먼저 들어왔다고 했다. 딸과 자주 노는 아이들 집을 찾아다니며 딸을 보았냐고 물었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골목 중간에서 딸 이름을 크게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심장이 정신없이 쿵쿵 내달렸다. 집 앞 골목에서 우리 집 쪽을 쳐다보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통창으로 아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들은 자고 일어나서 기분이 좋은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댔다. 아들에게 손짓하여 현관으로 오라고 했다.

"엄마 뭐해요?"

"동생 찾으러 나왔어"

"없어졌어요?"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엄마가 동생 찾으러 다닐 테니까 연락 오면 집으로 얼른 오라고 해"

"응"


날이 꽤 어두워졌고 골목을 몇 번 더 오르내리며 찾다가 딸이 집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는 안도감과 함께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집에 들어와 딸에게 화를 내며 언성을 높였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겁도 없이 어두운 데 돌아다니냐는 훈계로 시작했지만 곧 나는 너희들 약속을 다 지켜주려고 애쓰는데 왜 엄마가 오랜만에 한 부탁은 못 들어주냐는 자기 비하성 넋두리로 이어졌다. 전화가 울렸다. 약속 시간이 꽤 많이 지났는데 왜 아직도 안 오느냐는 전화였다. 차에 시동을 걸고 운전을 시작했지만, 마음이 너무나 불편하여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골목을 벗어나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분위기가 썰렁해진 집으로 남편이 퇴근했다. 닭개장과 밥, 김치만 덩그러니 식탁에 올려 밥상을 차렸다. 우리 집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초라하고 싸늘한 저녁이었다.


평소에는 식탁에만 앉으면 뉴스나 잡지에서 읽은 괴상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들이 이날 저녁에는 식사 내내 아무 말도 없이 한 그릇을 비운 뒤 도망치듯 2층으로 올라갔다. 내 마음에 무서운 후회가 엄습했다. 입시 준비로 신경이 곤두선 아이를 두고 별것 아닌 일에 내가 너무 멀리 갔다. 남편이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새로 산 비타 믹스에 마차 가루와 우유를 넣어 말차 라테를 만들고 아이들을 불렀다.

"아빠가 마차 라테 만들었어. 내려와서 마셔!"

아들은 후다닥 내려와 한 잔을 들이켜고 다시 도망치듯 자기 방으로 갔다. 딸도 말없이 마시고 뒤이어 올라갔다. 아까 옹색한 식탁 앞에 앉은 아들 얼굴보다 말차 라테를 마시는 아들 표정이 조금은 나아 보여 마음이 살짝 가벼워졌다. 설거지를 치우고 무슨 얘기를 했는지 지금은 기억이 전혀 안 나는 이야기를 남편과 나누다가 침실로 올라갔다. 보통은 강아지를 2층에 데려가서 재우는데 그 무렵 강아지 코 고는 소리에 잠을 깨는 일이 많아 그날은 강아지를 아래층에 두고 올라갔다. 9시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2층 아들 방은 벌써 불이 꺼져있었다. 이렇게 일찍 자는 일이 없는데 이상했지만 피곤한가 보다 했다.


"아들, 잘 자"

닫힌 방문에 대고 미안한 마음을 실어 다정하게 소리치고 서재로 향했다. 미국 대학은 학비가 상상을 초월하게 비싸서 대학 지원에 앞서서 학비 재정 지원을 신청하는 웹사이트에 대부분 등록해 둔다. 며칠 전부터 재정 지원 신청에 필요한 서류를 차근차근 모아두었고, 이날은 계정 개설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필요한 증빙 서류가 많아서 입력하는 데 한 시간 반은 족히 걸렸다. 서류를 뒤적이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우리 부부는 희망에 찬 대화를 나눴다. 아들이 명문대에 진학할 날이, 남편이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임원으로서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나의 부동산 사업이 궤도에 오를 날이 코앞인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계정이 개설되었음을 확인하는 페이지를 출력하여 책상에 올려놓고 침실로 향했다. 내일 아들한테 보여주어야지.



그날


기상 알람이 울리기 전에 잠이 깼다. 기분 좋게 뒤척이다가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러 내려갔다. 이날 아침으로는 치아바타 브레드를 반으로 갈라서 시금치 페스토를 바르고 치즈와 햄, 토마토를 올린 파니니를 준비하고 있었다. 도시락은 참치 주먹밥이었다. 밥에 단촛물을 넣어 간을 하고 야채를 잘게 다져 참치와 함께 섞었다. 파니니 메이커가 달아올랐는데 막상 아침 먹고 학교에 가야 할 아이들이 아직 식탁에 나타나지 않았다.


남편한테 애들 좀 깨우라고 소리쳤다.

"방에 없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방에 없으면 화장실에 있겠지. 여전히 아들은 내려오지 않았다. 한참 후 남편이 긴장한 목소리로 2층에서 소리쳤다.

"화장실에도 없어"

머리가 쪼그라들고 심장이 달음박질했다. 아들은 마당에 있는 채소와 화초 돌보는 일을 좋아하니까 뒷마당에 나갔나? 슬리퍼를 신고 뒷마당으로 나갔지만 아들은 없었다.

어디로 가야 아이를 찾지?

정말 멀리 갔을 거 같았다. 슬리퍼를 신고 찾을 수 있는 거리에는 없을 거 같았다. 파니니 플러그를 뽑고 아들을 찾으러 먼 길을 떠날 각오로 집에 연결된 차고문을 열었다.

거기에 바닥에 누워있는 아들이 보였다.


"악"

그다음부터 일어난 일은 망상이나 환영 같았다. 달려가 아들을 안았다. 곤히 자는 얼굴이었다. 나는 정신 차리라고 소리치며 얼굴과 팔다리를 닥치는 대로 주물렀다. 남편과 딸이 뛰어 내려왔다. 남편이 911에 다이얼을 돌린 뒤 전화기를 딸에게 건네고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딸이 구급대원에게 집 위치와 아들의 상태를 설명하는 동안 나는 곁에서 아들의 손발을 계속 주물렀다. 구급대만 오면 내 아들이 살아날 것 같았다. 멈춘 듯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구급대가 도착했다. 가족은 모두 집안에 들어가라고 했다. 구급대가 인공호흡을 하여 아들 정신이 돌아오는 걸 내 눈으로 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집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경찰관 여러 명이 들어와 뭔가 경비하는 자세로 늘어섰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누가 최초 발견자이냐고 물었다. 내가 최초 발견자였다. 나는 이어지는 질문에 계속 대답을 했다. 마약에 대해서도 물었다. 아들은 마약을 한 적이 없다고 아는 대로 답했다. 아들이 깨어났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어서 차고에 가보려고 몇 번 일어섰지만 그때마다 제지당했다. 한참 걸려 경찰이 알고 싶은 것을 전부 묻고, 내가 아는 것을 모두 진술했을 때쯤, 경찰이 미안하다고 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너무 늦었다고.


이거 꿈이지? 뭐 이런 악몽이 다 있어. 나 좀 당장 깨워줘.

경찰이 말했다.

"No, you are not dreaming. It's r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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