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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현실의 연결고리

by 글벗

아침이 밝는다는 사실이 다행이면서도 이상했다.

아들이 없는 세상에서도 해가 뜬다는 현실이 배신처럼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아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책감, 호흡 곤란과 흉통에 버무려진 밤이 지나가서 다행이었다. 부모야 어떻게든 버틴다 해도 어린 딸아이가 앞으로 겪을 수 있을 일을 떠올리며 벌떡 일어났다. 몸서리를 치며 1층에 내려가니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있었다. 딸아이 방에서 밤을 지내주었다는 걸 알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배려에 고마움이 내 마음을 흥건히 적셨다. 그중 한 분에게 딸아이가 다니는 중학교 교장선생님을 만나달라고 부탁드렸다. 이 사건은 학생들과 학부모 모두에게 충격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만한 일이었고, 어떤 루머로 돌변하여 딸을 괴롭힐지는 모를 일이었다. 학교에서 정확한 사실을 알고 있어야 루머가 돌더라도 딸아이를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교장선생님이 한국인이어서 이런 요청을 조금은 더 편하게 할 수 있었다.


그 후 며칠간, 익숙한 세상을 떠나 비극으로 내던져진 일상 속을 떠다녔다.

힘든 시간 내내 우리 곁을 지켜주고 호의를 베풀어 준 이웃의 은혜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때 나는 신이 내린 가혹한 형벌을 맨몸으로 견디느라 예의나 염치를 챙길 힘조차 없었다. 비애, 분노, 혼란, 그리고 그 감정들이 뒤엉킨 정신적, 신체적 고통도 괴로웠지만, 아들의 죽음을 사회적으로 공식화하는 절차들은 이 악몽을 영원한 현실로 못 박는 듯 더 고통스러웠다. 사별은 어떤 면에서 갑작스레 닥친 수동적 경험인 반면, 죽음을 공식화하는 일은 나의 적극적 개입을 요하는 일이었다. 순서가 거꾸로 된 죽음 앞에서 나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더구나 양가 부모님이 한국에 계셔서 미국의 장의사나 추모관 등을 알아본 적조차 없었다. 이런 준비는 원래 내 아이들이 나를 위하여 해야 하는 일이었다. 넋이 나간 우리 부부 대신 이웃들은 명망 있는 장의사를 수소문해 연결해 주었고, 그 지역 추모관과 위치와 장단점을 표시하여 엑셀파일로 정리하여 추모관을 차례로 함께 방문해 주었다. 영정 사진을 고르고, 인화하고, 액자에 넣고, 상복과 유골함을 고르는 모든 순간이 혼자였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2020년에 쓴 글에 그때 심정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에 깨진 유리 조각이 박힌 거 같다"라고 썼다. 장례식 전, 나는 신경안정제 몇 알과 청심환을 삼키고도 신을 향해, 목사님을 향해, 이렇게 억울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통곡했다. 그 아이가 얼마나 착한지 아느냐고, 그 착한 아이를 데려가는 그 따위 신이 어디있냐고. 장례식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아이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실감이 났던 것 같다. 막상 장례가 시작되자 아이가 마침내 평안을 찾으리라는 이유 모를 위안이 들었다. 아들의 죽음은 장례식을 통해 공식적인 사실이 되었다.


장례를 치르고 다음 날(어쩌면 그 다음날), 남편과 함께 아들 방에 들어갔다.

장례식 전에도 방문을 연 적은 있지만 책상 위에 국화 화분을 올려놓은 것이 전부였다.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남편과 함께 방에 천천히 들어서자, 그제야 방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다. 화분을 올려놓을 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방이 지나치게 깨끗했다. 침대와 책상은 물론, 붙박이장 안의 수납함까지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욕실 캐비닛 서랍을 열어보았다. 평소 온갖 잡동사니가 쑤셔 박혀있던 서랍 안에는 한두 가지 쓸만한 물건만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옷장 속 격자 수납장도 마치 전시해 놓듯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며칠 전 아들이 수 년 간 모은 태권도 벨트를 내게 준 기억이 떠올랐다.

서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들어와 매우 멋쩍게 말했다.

"엄마 이거 가져요"

돌아보니 하얀 띠부터 2단까지 수십 개의 벨트를 단정하게 말아 묶은 꾸러미였다.

"와 아들 이걸 다 정리했네? 네 방에 두지, 왜 엄마한테 줘?"

"그냥. 내 방에는 자리가 없어서. 엄마가 갖고 있는 게 좋을 거 같아"

그 순간, 갑자기 철든 것 같은 아들이 기특하면서도 무척 낯설었었다. 이 비극의 퍼즐 한 조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침대 밑에 구겨서 버린 종이가 보였다. 펴 보니, 며칠 전 내가 서명해 준 성적증명서 신청서였다. 인터넷으로 성적을 대부분 확인할 수 있지만, 방학 동안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수강한 과목은 나오지 않는다.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수강한 과목의 성적은 이미 해당 웹사이트에서 확인을 했었고, 반영이 안 되어있으면 대학에 별도로 제출해야 하는지 여부를 알고 싶어서 요청한 것이었다. 아이는 제출했다고 했고, 다음 날 찾는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제출조차 하지 않은 거다. 이 아이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일을 준비한 걸까?


아들은 모든 컴퓨터와 스마트 기기를 포맷하고 락을 걸어놓았지만 대학 입학 에세이 두 편만은 남겨두었다. 며칠 전 보여달라고 했을 때 지금은 절대 안 된다, 나중에 보여주겠다고 했었다. 아이가 보란 듯이 올려둔 에세이 두 편을 읽었다. 글 속에는 대학에 대한 기대감이나 의욕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적은 듯, 무기력, 외로움, 절망을 끄적인 미완성의 글이었다. 그 즈음 아들의 미국 여권이 도착했다. 여권 사진 찍던 날, 얼마나 가기 싫어했는지 떠올랐다. 옷도 챙겨 입지 않으려는 아이를 열심히 구슬려서 데리고 갔었는데. 그러고 보니 아이는 입시 준비에 지나치게 무관심했다. UC(University of California) 계열 대학에 가고 싶다면서도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며칠 전 저녁 식탁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아들은 평소 식탁에서 방귀, 구토, 벌레, 좀비 같은 이야기를 하여 우리를 놀리는 걸 좋아했다. 그날은 유난히 들뜬 얼굴로 말했다.

"그거 알아요? 가스를 들이키면요 두뇌는 가스와 산소를 구분 못해서 아주 편하게 죽을 수 있다는 거"

웬만하면 아이 말에 기꺼이 호응해 주는데 그날은 등골이 서늘해서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정색하고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냐고 캐물으며 그만하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그 후 마음이 내내 불안했다. 아들에게 나쁜 생각하는 건 아니냐고 몇 차례 물을 정도로. 엄마와 얘기하는 게 싫고 엄마가 너를 잘 도와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네가 마음 터놓을 수 있는 카운슬러를 만나러 가자고 했었다. 그때 아들의 대답이 영 못미더웠었다. 아마 나는 믿고 싶지 않을 것을 대면할 용기가 없어서 못미더운 대답을 괜찮다는 걸로 해석했을지도 모른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기억이 지금의 현실과 조금씩 연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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