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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텨야 할 시간

by 글벗

한동안 밖에 나가지 못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햇살만 봐도 내가 어둠이라도 되는 듯 밝은 빛 앞에서 몸이 웅크려졌다. 거리를 걷다가 모르는 사람과 마주쳐도 내가 자살한 아이의 엄마라는 걸 알아볼 거라는 망상에 빠져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슈퍼마켓이 특히 어려운 공간이었다. 다른 사람과 마주치는 것도 두려웠지만 아들과 장을 보면서 떠들던 기억이 밀려와서 슈퍼마켓 안에서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꽤 오랫동안 음식도, 딸아이 등하교도 이웃의 신세를 졌다. 사람들은 나를 데리고 나가 햇빛을 쐬도록 해주었다. 밖에 나가면 모자를 쓰고도 고개를 들기 어려웠지만 차츰 밖에서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신경안정제를 계속 복용했다면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신과 약을 복용하는 것이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우울증 병력이 있어서 몇 가지 약을 처방받아 놓았지만 장례식 이후에는 복용을 모두 멈추었다. 나의 슬픔이 무뎌지는 것이 싫었다. 밤에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고 짐승 같은 울음을 울었다. 아들을 잃은 엄마가 비애에 몸부림치는 것은 당연했으며, 충분히 슬퍼하고 싶었다.


집과 시간이라는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하루 종일 뜨개질을 했다.

코바늘 뜨기는 처음이었지만 친구가 잘 가르쳐주었다. 이웃에 사는 친구들 세네 명이 모여 앉아 함께 뜰 때도 있었다.

하나, 둘, 세 코를 올리고, 실을 걸어서 빼뜨고. 또 하나, 둘, 세 코를 올리고...

코바늘로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덧 수세미나 컵받침이 모습을 갖춰갔으며 하루 해가 저물었다. 차곡차곡 쌓이는 수세미와 컵받침을 고마운 분들에게 드렸다.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다는 걸 아는 마음의 표시로 받아주기를 바랐다. 자살이라는 어둠을 겪은 나한테 물건 받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을까 우려도 되었지만 모두들 받아주셔서 또 고마웠다.


남편은 더 힘든 여정을 걷고 있었다.

남자들은 시간을 내기 어렵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일에 서툰 면이 있기 때문이다. 한두 번 들른 동료 외에는 남편 곁에서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딸과 나뿐이었다. 남편과 나는 함께 슬퍼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남편은 충분히 슬퍼할 여유도 없이 업무에 복귀했다. 남편은 아들의 유골을 한국에 가져가 다시 한번 장례 자리에 앉아있었다. 아들을 잃은 남편이 져야 했던 짐이 나보다 훨씬 무거워서 마음이 지금도 안쓰럽다.


딸은 가장 큰 피해자였다.

자신보다 마흔 살쯤 많은 손님들과 장난치고, 계속 배구를 하러 가고,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어린 딸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큰 일이었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삶의 무대를 옮길 때마다 자살유가족이라는 스티그마가 딸의 마음을 괴롭힐 텐데. 딸의 마음에 대해 눈을 뜨게 도와준 친구가 있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친구였는데 소식을 듣고 달려와 함께 울며 자신의 오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네 살 때 오빠를 익사 사고로 잃었지만 대학생이 되어서야 다른 사람에게 오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고. 친구는 틈 날 때마다 들러서 눈물을 흘리며, 오래전에 못 흘린 눈물을 지금 흘리는 것 같다고 했다. 형제를 잃은 슬픔이 얼마나 마음 깊이 가라앉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훗날 딸은 오빠가 즐겨 입던 옷과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만 보아도 모두 오빠로 보였다고 했다. 사건 후 친구 집에서 이틀 밤을 지내는 동안, 딸아이는 이 충격을 함께 나누고 울 수 있는 가족과 분리되어 있었던 거다. 그날 딸을 데리고 있지 않았던 것이 무척 가슴 아프다. 딸에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더라도 함께 있었어야 했다. 그래야 딸도 맘껏 울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나약함을 내보이는 데 너무 서툴렀으며 나약함이 가져올 실패를 막는데 너무 급급했다.


한 달 후에는 미국 추수감사절이었다. 모처럼 흩어져서 지내던 가족이 한데 모여 정을 나누는 즐거운 기간 동안 우리끼리 집에 남아서 보내는 게 두려웠다. 주변의 착한 분들에게 또 다른 부담을 드릴까 걱정도 되었다. 아들 생일이 추수감사절 기간에 있었던 것도 힘들었다. 우리 가족은 동네를 잠시 떠나 있고 싶었다.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간 곳은 황당하지만 라스베이거스였다. 아무 정보를 찾지 않고 무작정 떠나도 항상 호텔방이 있고 호텔을 나서거나 나서지 않거나 시간 때울 거리가 넘쳐나는 곳.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차 안에서 딸이 예전에 라스베이거스로 향할 때 녹음한 대화를 틀었다. 아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큰 카지노들은요, 네바다주가 아니라 플라밍고라는 인디언 영토에 있다요. 그래서..."

차 안에 아들이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출발 전 여행용 욕실용품을 아들이 유치원에 가지고 다니던 도시락 가방에 챙겨 왔다. 아들, 우리랑 같이 라스베이거스 가는 거야.

호텔 기념품점을 기웃거리다가 이름을 새겨놓은 열쇠고리 판매대를 보았다. 아들의 영어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이름을 새겨놓은 열쇠고리를 사면서 울었으니 남들 눈에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는 온종일 돌아다녔다. 거리는 갖가지 모습의 사람들도 북적이었다. 군중 속에서 휠체어를 밀고 가는 부부가 보였다. 휠체어에 앉은 사람은 아들 나이 또래로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혼자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았다. 즐거운 얼굴로 휠체어를 밀고 가는 부부. 예전에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궁금했었다. 저 사람의 삶은 너무 무겁지 않을까? 그날은 그 부부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내 아들이 휠체어라도 타고 있었으면 좋을 텐데. 아니, 병실에 누워 깨어날 날을 기다리고만 있어도 좋을 텐데. 밤에 호텔방에 들어오면 또 뜨개질을 하고 눈물도 흘렸지만 추수감사절은 그렇게 지나갔다.


뜨개질을 하고, TV를 보고, 책을 읽으면서 두세 달이 흘렀다. 나는 일을 조금씩 다시 시작했다. 오랜만에 한 문단짜리 번역을 하고 훑어보다가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짤막한 문단 한 토막이 온통 오자를 넘어 말이 안 되는 단어 투성이었다. 몇 번의 교정을 거쳐 짤막한 번역을 보냈다. 짧은 번역을 몇 번 하는 동안 오류는 점점 줄어갔고 나는 아주 천천히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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