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우리 가족은 비극의 회오리가 지나는 길목에 서있는 것 같았다.
시작은 그해 여름 대학 친구의 죽음이었다. 풋풋한 대학 새내기의 모습으로 만나서, 각자 남자 친구를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때로는 직장 생활과 육아의 고단함을 함께 수다로 달래기도 했던 친구였다. 암 완치 판정을 받고 이삼 년 건강하게 지내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호스피스로 옮겼을 때였다.
두세 달 후, 아들과 같은 학교 학생 하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아들의 장례식 즈음에는 또다시 그 학교 학생 하나가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아들이 떠나기 열흘 전에는 친구 H의 남편이 어이없는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우리 가족이 미국에 정착하도록 요모조모 도와준, 마음씀이 예쁜 부부였다. H 부부의 첫째와 둘째가 우리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여서 사촌지간처럼 친하게 지냈기에 우리 아이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이었다. 게다가 세살배기 늦둥이 막내가 한창 재롱을 부린다고 얘기한 것이 엊그제였다.
아들이 떠날 즈음에도 우리 가족은 앞서 떠난 사람들에 대한 애도에 젖어 있었다. 아들의 죽음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앞선 이별들과 비교가 안 되는 강도의 충격이었다.
충격에 휩싸였던 처음 몇 달은 마치 예견된 일이 일어났다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주변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아들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전조라고 여겨졌고, 이 일은 오래전에 결정된 일이었으며, 나는 그것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왜곡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내가 무참한 충격을 받았다는 실상과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아들의 때 이른 죽음이 예정된 것도 아니었고, 내가 미리 예감할 수도 없는 일이었음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예견되었다는 느낌은 결국 기억들을 헤집어 결말에 억지로 꿰어 맞추는, 사후 확신 편향(Hindsight Bias)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식이었다.
아이가 엉뚱한 장난을 하면 종종 "네가 무슨 피터팬이냐? 아직도 이런 장난을 하게" 하고 아이를 피터팬이라고 불렀는데, 사건 후에는 이런 대화가 '아이가 네버랜드로 돌아갈 거라는 예감'으로 해석되었다.
몇 해 전, 뒷마당의 들깨 모종이 동전만 한 깻잎을 몇 장 내다가 한 뼘도 되기 전에 씨앗이 앉더니 시들어 버린 일이 있었다. 그 깻잎을 보고, 키가 자라기도 전에 2차 성징이 와서 성장이 멈춘 아이를 떠올렸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때 너무 일찍 성숙한 아이가 너무 일찍 떠나버릴 거라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던 것만 같았다.
벽에 걸린 아이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도 났다. 아이가 내 곁에 떠난다고 해도 아이와 누린 행복은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실재라는 생각. 이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때 화들짝 놀라면서 에미로서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확 밀쳐냈었다.
남편과 딸도 이런 결말을 오래전부터 예감했다는, 내가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했음을 털어놓았다. 그때 우리 가족은 이 일을 예견한 꿈을 꾸었다고, 아들의 눈빛에서 이 일을 예견했다고, 삶의 곳곳에서 아들에게 짧은 생이 예정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조짐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왜곡된 사고였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딸은 앞날이 창창한 오빠가 생을 스스로 마감했을 리 없다면서 오빠의 죽음 뒤에는 틀림없이 배후 세력이 있다는 주장을 했다. 오빠가 쓰던 통신 기기들을 몰래 대리점에 가지고 가서 잠금을 풀어서 디지털 자취를 추적하기도 하는 등 딸이 한 동안 배후 음모를 캐고 다녔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이 사건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가, 아니면 예견된 일인가 사이에서 꽤 오래 혼란스러웠다.
그해 여름에 함께 캠핑을 갔던 친구 K의 가족은 캠핑에서 아들과 대화를 나누며 아들의 조숙함이 걱정스러웠다고 했다. 아들 장례식 추도사에서 K의 남편은 아들이 인생을 이미 알아버린 '꼬마 철학자'였다면서, 아들에게 "인생을 그렇게 다 알면서 앞으로 무슨 재미로 살 건데?" 했다고 회상했다. 심리상담가인 친구 K는 아들의 눈빛이나 행동이 걱정스러웠는데 전문가로서 비극을 막지 못한 것을 자책했다. 몇 개월 후에 만난 K 부부는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말도 안 된다고 했다.
모두 예감했다면서 모두 충격을 받았다.
예감은 진실이 아니었다.
아들의 때 이른 죽음을 예감했다는 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우리 가족은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비극을 막으려고 온 몸을 던졌을 것이다. 다만, 비극이 예견된 일이라는 착각을 통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충격에 더 쉽게 적응했고, 이미 예정된 일이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는 면죄부를 잠시 동안 받는 듯했다. 이런 속임수는 오래가지 않았다. 예견하고도 비극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날로 무거워졌고, 반대로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는 무기력함이 들 때는 아이를 다시 한번 포기하는 듯 괴로웠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는 식으로 대충 넘어간다면 비극에 다시 찾아올 거라는 무서운 불안이 왔다.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던 시점을 찾아야 했다.
다른 결정을 내렸다면 아들을 잃지 않았을지 모르는, 그런 순간을 찾을 수만 있다면...
물론, 결정이 바뀌어서 생기는 경우의 수만큼 시나리오를 수만 번 쓰더라도 그라운드 호그 데이가 수만 번 반복되지 않는 이상, 한 번뿐인 인생에서 상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삶의 날줄과 씨줄이 뒤틀어져서 매듭이 되고 방향이 틀어진 지점을 알아낸다면, 남은 아이를 지킬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길 것 같았다. 그리고 아들에게 사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아들이 했던 이 말이 아들의 유언일지 모른다.
나도 너를 그렇게 외롭게 하는 사람 중 하나였겠지. 너무너무 미안해. 그런데 미안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한 마디로 모든 걸 뭉뚱그리지 않을게. 네가 왜 이 세상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했는지 꼭 알고 싶어. 이 여정을 걸으면서 네가 진심으로 아끼던 네 동생을 꼭 지켜줄 수 있으면 좋겠어. 어쩌면 그 아이는 네가 힘들었던 것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