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부터 옷을 좋아했고 마산과 창원에 살 때는 주기적으로 백화점 쇼핑을 다녔는데 김해 장유로 이사 오고 나서는 쇼핑할 곳이 없었다. 그러다가 퇴근길에 들르던 작은 옷가게에 단골이 되어갔다. 내가 좋아하는 내 스타일의 옷들을 살 수가 있었다. 직업이 치과위생사였기에 출근하면 유니폼으로 갈아입어서 옷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도 옷은 늘 사고 싶었다.
단골로 가게 된 옷가게 주인은 나보다 네 살 아래의 동생이었는데 나와 비슷한 점은 그 동생도 장유로 이사 온 지 몇 년이나 되었고 많은 사람을 상대하지만, 개인적으로 친분을 맺으면서 지내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 둘은 점점 가까워졌다. 가까워지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는데 둘 다 비슷한 그런 부분 때문에 잘 친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부터 친해지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는데 어느새 우리는 가랑비에 옷 젖듯이 친해져 있었다. 신상이 내려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들러서 옷들을 입어보았다. 입는 옷마다 잘 어울리고 내가 옷을 입어보고 있으면 구경 왔던 손님들이 내가 입은 옷을 보고 사가기도 했다. 다들 잘 어울린다며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옷가게 동생(이하 ‘순미’라고 부름)도 물건 해오면 나에게 자꾸만 ‘이거 입어 봐라’ ‘저거 입어 봐라.’ 주문했으며 나는 신이 나서 옷들을 열심히 입어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 입은 모습을 보면서 옷을 집어가는 것이었다. 내가 돈 버는 것도 아닌데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단골로 지내면서 옷가게 피팅 모델이 된 기분이었다.
‘나도 이런 옷가게 하고 싶다.’ 용기가 없었기에 속으로만 생각했고 부럽기도 했다.
순미와 친해지면서 순미는 내가 사는 아파트로 따라 이사를 왔다. 같은 아파트 옆 동에 살면서 동네 친구가 없었던 우리는 친구처럼 자주 대화도 나누고 밥도 같이 먹고 시간이 맞을 때는 여행도 같이 가고 집을 오가기도 했다. 아직 유치원 다니는 어린 딸이 있었던 순미는 서울에 물건 하러 갈 때 아이를 우리 집에 맡기기도 했다. 순미 딸은 우리 집 작은아이를 잘 따르고 좋아했다. 아빠가 새벽에 출근하는 까닭에 우리 집에서 재우고 아침에 유치원 차에 보내면 되는 것이었다.
달달 슈가네 photo by sugar
직장생활에 지치고 결혼생활에도 지쳤던 40대 초반. 2011년 8월 15일이었다.
그때 여름휴가 기간이어서 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순미가 7년을 해 온 작은 옷가게는 ‘보보 하우스’였다. 이 가게를 내가 하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딱 이틀만 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순미는 나에게 직장에서 받는 월급보다 훨씬 많이 벌 수 있다면서 걱정하지 말고 시작해 보라고 했다.
그 자리가 상가 안에서도 명당자리 같은 곳이었다.
"언니는 옷발이 좋아서 그냥 언니가 입고 있으면 팔릴 거예요."
"서울 가서 언니가 입고 싶은 옷을 가져와서 팔면 돼요."
"언니는 센스가 있고 감각이 있어서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이 자리는 위치가 좋아서 남 주기 아까워서 언니한테 먼저 물어보는 거예요."
"부동산에 내면 바로 나갈 자리예요."
순미의 이 말은 다 사실이었다. 그 당시 ‘보보 하우스’는 '장유'에서는 유명한 옷집이었다.
옷가게는 별로 없었으며 유입된 젊은 사람들은 많았다. 작은 옷가게가 늘 사람들로 붐비는 대박 집이었다.
나는 정말로 딱 이틀만 고민하고 결정을 내렸다.
9년 넘게 근무했던 치과의 원장님은 병원 문 닫을 때까지 같이 가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내가 걸 수 있는 비전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온 새로운 기회를 잡기로 결심했다. 휴가 마지막 날 저녁에 원장님 댁에 전화를 걸었다. 다음날 출근해서 얼굴 보면서 말할 용기가 없어서 전화로 말씀을 드렸다. 직원이 구해질 때까지 내 업무는 바로 밑에 후배에게 인수인계를 잘해줄 테니 걱정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원장님은 서운함을 화를 내면서 그냥 사모님을 바꿔주시는 것이었다. 사모님께 차분하게 이런 상황을 설명해 드리고 내 마음이 약해져서 결단을 번복할까 봐 계약금 일부를 이미 주었다고 말씀드렸다. 사모님도 물론 나에게 걱정이 더 많으셨다. 원장님과 사모님을 알았던 것이 내 나이 22살 때부터였기 때문이다.
치과 일을 10년 이상 손 놓고 살던 나를 다시 불러 주신 것이었다. 이런 특별한 인연이었던 내가 갑자기 그만둔다고 했을 때 많이 서운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진심으로 나의 앞날을 걱정해주신 두 분이셨다.
“그렇게 돈을 투자해서 힘든 옷 장사를 하려고 해요?
그냥 안정적인 병원에서 한 십 년만 더 일하고 편하게 쉬면 되지 않겠어요?”
“사모님 10년 뒤면 제가 지금의 사모님 나이가 되는데 그때도 지금 사모님처럼 남편이 벌어주는 돈으로만 살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지 않고 안주하며 살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아요.”
“지금 이 선택을 하지 않으면 10년 후에는 치과를 그만두어도 이런 도전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안 생길 것 같습니다."
"그리고 10년 후에는 아무도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지도 않을 것이고요. 계속 일을 해야 하는 제가 10년 뒤에 새로운 일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지금 변화해야 한다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이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하자 사모님은 더는 어떤 말도 나에게 할 말이 없으신듯했다.
그때 시작을 해야 혹시 실패하더라도 무언가 재도전할 수 있는 여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오십을 넘긴 나이에 내가 집에만 안주하고 있을 성격이 아니란 것을 나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단 이틀 만에 옷가게 사장님이 되기로 했다.
참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가게 근처 수변공원 photo by sugar
어느 날 문득 기회는 온다.
우리는 기회를 기회인 줄 모르고 놓치기도 한다.
그것을 영원히 모를 수도 있고 세월이 지난 후에 그것이 기회였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아줌마로 살아가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각자가 사는 방법이 다르고 목표가 다르고 이상이 다를 뿐이다.
다만 나는 그냥 아줌마로만 살기는 싫었다. 분명히 직업이 있었지만 ‘갑’과 ‘을’의 관계로 일하는 것에 회의가 느껴지던 때에 기회가 온 것이었다. 모든 것이 장단점이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하고 싶고, 미쳐서 할 수 있는 내 일을 하고 싶어서 과감히 직장을 버린 것이었다.
말리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때 내가 생각했던 한 가지는
‘지금 하지 않으면 더는 이런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에서 ‘옷가게 사장님’이라는 힘든 직업을 선택했다.
그리고 9년의 세월 동안 내가 직장인이 아니고 ‘옷가게 사장님’이 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설령 더 힘들고 고단했어도 내 성격은 어쨌든 나아지는 길을 만들려고 최선을 다하고 분명히 잘 되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다. 그리고 어느 곳에 가서 지금 하는 일을 시작하더라도 잘해 낼 것이라는 자신감 또한 있다.
기회가 왔지만 내가 잡지 않는 것은 나에게는 기회가 아니다.
어떤 기회가 온다면 너무 많은 생각으로 놓치지 말고 잡아야 만이 나에게 기회가 된다는 것을 살면서 종종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