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즐거운 편지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를 제재로 수업할 때면 더없이 행복하다. 읽기만 해도 가슴 떨리는 구절들로 서로의 삶을 나눌 수 있으니, 이보다 가슴 충만한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동시에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시를 그저 느끼는 것에서 그칠 수 없을 때, 결국은 기존 평설의 내용을 끌어와 매끈하게 정돈된 시험 문제를 내야만 할 때, 실로 애석하고 씁쓸하다. 시를 통째로 소화하기보다 난도질하는 데에 더 익숙한 아이들, 누구를 탓하랴.
내가 사랑하는 시들은 가르치지 않고 그저 읽어주고 싶다. 봄에는 복효근의 ‘목련 후기’를, 여름에는 나희덕의 ‘일곱 살 때의 독서’를, 가을에는 문태준의 ‘운문사 뒤뜰 은행나무’를, 그리고 겨울에는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를….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에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황동규, 즐거운 편지
부산에 살다 보니 겨울에도 눈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언젠가 고즈넉이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수업을 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모든 걸 제쳐 두고 이 시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낭독하리라. 그러고 나면 한동안 침묵해야지. 꽤 오랜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는 비로소 입을 열어 주저리주저리 털어놓을 것이다. 내가 이 시를 사랑하는 이유를, 그리고 이 시간을 기다려 온 나의 오랜 그리움에 대해….
너희는 혹시 그런 경험 없니. 일상에서 너무나 익숙하게 사용하던 단어인데, 갑자기 그 단어가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말이야.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그랬거든. ‘사소한 일’이란 어떤 것일까. 나는 무엇을 ‘사소하다’고 여기며 살아왔나. 불현듯 찾아온 생경한 느낌을 지울 길이 없어 사전을 뒤적였지. ‘보잘것없이 작거나 적다’라니…. 왠지 서글픈 마음이 들었어. ‘보잘것없이’라는 말이 꼭 붙어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시의 화자인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 그대를 생각하는 것은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상적인 자연 현상처럼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당연하다고 해서 사소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만 소중한 것들을 사소하게 여기며 살아온 시간이 문득 애틋해졌어.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이 사소한 일이라 말하는 마음, 그 마음이 결코 사소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 더군다나 그대가 괴로움 속에서 한없이 헤맬 때야 비로소 그대를 불러 보겠다는 마음이라면….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너무 어려운 질문이지?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어렴풋이 깨달았어. 사랑은 끝없는 기다림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내가 사랑의 기준이 되지 않는 것, 너와 나의 어긋남을 인정하는 것, 각자의 속도를 존중하며 서로를 기다려주는 것. 비단 사랑뿐만이 아닐 거야. 우리는 늘 조급함 때문에 많은 것을 놓치며 살지. 섣불리 판단하고, 성급히 얻으려다 잃고 만 것들…. 그때 조금 더 기다렸다면 어땠을까.
사랑을 고백하면서 그 사랑의 끝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사실 난, 그래서 더 좋았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절대 변치 않겠노라 다짐하는 말보다, 유한한 사랑일지라도 사랑이 다 하는 날까지 기꺼이 기다리겠다는 말이 훨씬 더 진정성 있게 다가왔거든. 퍼붓던 눈이 그치듯 언젠가 사랑이 끝나는 순간에도 ‘나’의 시선은 그대가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향해 있어. ‘나’는 사랑을 구하려고만 하지 않고, 사랑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인 거야.
놀라지 마. 사실 이 시는 황동규 시인의 데뷔작으로 1958년에 발표된 거야. 예순 살이 넘은 시인 거지. 게다가 시인이 고3 시절에 짝사랑하던 연상의 여대생에게 바친 시란다. 채 스무 살이 되지 않는 나이에 사랑을 대하는 자세가 이토록 성숙할 수 있다니…. 내가 만약 이 편지를 받은 그 여대생이었다면,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그의 구애를 받아들였을 거야. 상대방이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의연하게 사랑하겠다고 마음먹은 청년의 모습, 상상만 해도 흐뭇해지는구나.
이 시를 너희와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참 기뻐. 오해 마, 난 지금 이 시를 가르친 게 아니야. 그리고 걱정하지 마, 시험에 내지도 않을 거니까. 그래도 한 가지 바람은 있지. 훗날 너희도 이런 편지 한 통쯤 서로 주고받으며 사랑할 수 있기를, 고운 시 하나 마음에 품은 채로 사랑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