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자리

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되었다' 를 읽고 _ 가족과 돌봄

by 아름


“힘들더라도 좀 참고 했어야 했어. 어차피 끝이 있는 일을…. 그랬으면 지금 좀 더 편하게 살 거 아냐.”

명절에 시댁 식구들이 모일 때면 으레 고모님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고모님은 맏며느리였는데 젊은 시절 시부모 병수발을 거부했다. 고모부는 소문난 술주정뱅이에다 가정 경제에 무심한 반백수였다. 남편과 두 아들을 근근이 먹여 살리던 고모님은 시부모 병수발까지 할 수 없다며 재산 상속도 마다했다. 고모부가 술병으로 돌아가신 후 고모님은 시댁과 인연을 끊었다. 자연스레 그리 되었다. 결국 시댁 재산은 귀향 후 시부모를 봉양한 고모부 동생 내외에게로 돌아갔다.

고모님을 둘러싼 시댁 어른들의 시선은 어딘가 마뜩잖았다. 나는 외려 그런 시선이 더 못마땅했다. 시부모 봉양과 수발을 으레 맏며느리에게 떠넘기던 시절, 고모님은 그걸 의무가 아닌 선택의 영역으로 대했다. 부양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남편 대신, 내가 왜 그 일을 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재산이고 뭐고 필요 없으니, 나는 내 삶을 살겠노라고 선언했다. 고모님의 삶을 재단하는 잣대로서 ‘며느리의 도리’는 너무나 고루했고, ‘재산 상속’은 지나치게 단편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말을 하는 어른들이 대부분 남자라는 사실이 나는 가장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그에 반해 우리 어머님은 전형적인 효부의 삶을 사신 분이었다.

“아이고, 말도 마라. 내가 시집 온 그 날로 할머니는 부엌살림에서 손 뗐다. 누가 했겠노, 내가 다 했지. 막판에 거동 힘드실 때도 내가 할머니 대소변 다 받아냈다 아이가. 너희 아버지는 그런 거 하나도 모른데이.”

회상에 잠긴 어머님의 얼굴에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 ‘할 도리’를 다 한 자의 떳떳함, 응당 받아야 할 공치사에 대한 기대 같은 것들이 뒤섞여 나타나곤 했다. 나는 그런 어머님이 대단하고 또 안쓰럽게 느껴졌다. 다들 그리 하던 시절에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작한 일이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이 돼버리는 동안, 정당성이랄까 민주성이랄까 하는 것들은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었을 테니까.


어머님은 예나 지금이나 가족 돌봄의 총 책임자다. 퇴직하신 아버님의 삼시 세끼는 물론이고, 맞벌이 아들 내외와 손주의 끼니까지도 사실상 어머님 손에 달려 있다. 어디 끼니뿐인가, 두 집 살림 곳곳에는 어머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집안 살림에 관심 둘 틈도 없이 제 일 하느라 바빴던 나로서는 어머님의 살뜰한 지원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만약 어머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하는 잠깐의 상상에도 금세 아찔해 올 만큼 많은 부분을 어머님께 의지하며 살았다. 그간 아이를 키우면서 내 커리어를 쌓고 자기 계발에도 적잖은 시간과 돈을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어머님 덕분이었다. 기혼 직업여성의 자아실현은 기혼 직업남성의 자아실현보다 훨씬 제약이 많았고, 배우자의 배려뿐 아니라 또 다른 여성의 희생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베풀어야 할 팔자란다. 평생 일복 터졌지, 뭐.”

푸념이자 자기 위안이자 숭고한 승화 같기도 한 어머님의 그 말씀이 늘 귓가를 맴돌았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 그런 팔자가 비단 우리 어머님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휴직의 여유를 즐기며, 하원한 아이를 데리고 모처럼 놀이터에 들른 날이었다. 처음 뵙는 할머니들이 내 아이의 이름을 대며 반기시는 통에 어안이 벙벙했다. 어머님이 그간 놀이터 관계망(?)을 탄탄하게 형성해 놓으신 덕분이었다. 나는 별다른 노력 없이 할마 부대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재완이 할머니는 좋겠데이, 휴직도 가능한 며느리 둔 덕에, 올해는 좀 편히 쉬겠구만. 아이고, 부러버라.”

손주에 대한 애정과 황혼육아의 고달픔은 별개의 영역이었다. 자식 다 키워서 시집, 장가 보내놨더니, 매몰차게 거절하긴 난감하고 달갑게 승낙하기엔 힘에 부치는 또 다른 임무가 부과된 셈이었다. 할머니들의 사연은 각양각색이었다. 지하철로 왕복 두 시간이나 되는 거리의 딸네 집을 매일 오고 가신다는 할머니, 첫째 손주 키워놓고 이제 좀 편해지나 했더니 여섯 살 터울의 둘째 손주가 생겨 버려 좋으면서도 걱정이라는 할머니, 자기 혼자 사는 집에 맞벌이하는 아들 내외가 들이닥쳐 얼결에 같이 살게 됐는데 자식들은 퇴근해도 정작 본인은 퇴근이라는 게 없다는 할머니 등등.

가족 돌봄이 평생의 과업이자 존재 가치가 돼버린 중장년 여성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출산 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일과 육아의 양립을 지원하는 제도가 많이 마련되었다 하더라도 육아 공백은 여전히 존재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손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할머니였다. 독립한 자식 가정의 육아 공백까지 메우고 있는 할마의 존재는 금가고 밑 빠진 독을 가까스로 틀어막고 있는 두꺼비와 다를 바 없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휴직으로 내가 집에 있게 되자 어머님의 방문이 금세 불편해졌다. 습관처럼 매일같이 저녁 찬거리를 챙겨 오시는 것이 손주 끼니에 대한 감시처럼 여겨졌다. 그간 받은 도움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는 별개로, 아들 내외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시어머니의 존재가 며느리 입장에선 새삼 거북했다. 좀 더 편하게 어머님의 도움을 받고자 시댁 근처로 이사 온 거였는데, 현재로선 가까워서 더 불편한 지경이 되었다.

자신의 역할이 급격히 축소되고 손주가 나날이 엄마를 더 찾기 시작하자, 어머님은 한동안 공허함과 허탈감을 이기지 못했다. 자신만의 삶이란 게 없었던 인생에서 쉼 없이 수행해 온 온갖 돌봄 노동이 서서히 그 필요와 가치를 잃어가자, 어머님은 눈에 띄게 늙어갔다. 그 마음을 짐작해보려 애쓰면서도 나는 어느새 어머님의 삶을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자식을 삶의 유일한 기쁨으로 여기지 말아야지, 나는 내 삶을 살 거야, 와 같은 다짐들…. 일생을 바쳐 수행한 돌봄 노동이 사회적으로도, 심지어 가정 내에서도 우대받지 못하고 있었다. 시대적 맥락 안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혹은 ‘그렇게 내몰렸던’ 삶이 급격한 시대 변화 속에서 평가절하 되고 있었다.


놀이터 휴식 공간을 점유한 할마 부대의 넋두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육퇴를 갈망하는 저들에게 손주 돌봄이 진정한 사랑의 영역이 되려면, 돌봄 수행 여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부모 된 도리, 모성애, 손주 사랑 등을 실천하느라, 돌봄 공백을 자기희생으로 메우느라, 노년의 쉼을 반강제적으로 반납한 할마들에게 이제라도 자신만의 삶을 돌볼 권리를 되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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