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터뷰어

by 아름


결혼을 3주 앞둔 어느 날, 그이에게 사고가 났다. 뒤따라오던 트럭 운전사의 부주의로 출근길에 추돌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폐차해야 할 정도의 큰 사고였음에도 그는 타박상과 찰과상 외 다른 이상이 없었다. 놀란 마음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그만하니 천만다행이다. 너는 조상님이 여러 번 지키시는구나. 그나저나 형이 자기 차 타고 다닌다고 샘이라도 난 건지….”


연애 초기에 으레 하는 호구 조사에서 나는 그이로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었다.

“다른 형제 없어요, 저 혼자입니다.”

나는 막연히도 그가 장남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타인에 대한 배려가 깃든 그에게, 오랫동안 손아랫사람을 품어온 흔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이은 그의 말이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남동생이 하나 있었어요. 그런데 작년에 사고로 죽었습니다.”

한참의 침묵이 나의 곤란함을 대신했다. 더 묻지 않았다. 서로의 아픔을 공유할 시간은 당장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여겼다.




결혼을 하면 내가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그건 지나치게 낭만적인 생각이었다. 지난 8년 동안, 비명에 죽은 시동생의 존재는 이따금 불편하게 다가왔다. 무심하게도 기일을 깜빡한 적이 있었다. 밤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찾은 시댁에서, 어머님 혼자 정성스레 차리신 제사상을 마주했을 때 나는 너무나 민망하고 송구했다. 서운한 내색도 어떤 질책도 없이 괜한 걸음 하게 했다며 미안해하시던 어머님 앞에서 불안감과 불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우리가 나중에 이 제사 받아서 해야 하는 거 아냐? 앞서간 자식 제사는 안 지낸다던데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나.’와 같은 생각들…. 고인이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만 같아서 뜨끔했지만 내 솔직한 심정은 그랬다.


자식을 앞서 보낸 조부모에게 손주의 존재는 더더욱 각별했다. “우리 똥강아지 없으면 내가 웃을 일이 뭐가 있나.”, “우리 손자 덕에 살지, 내가.” 이런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실 때면 어머님이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주말 내내 장만했다는 아이 옷과 신발, 장난감과 먹을 것을 한 보따리씩 들고 오실 때, 나는 괜한 반발심으로 아이에게 삶의 의미를 두는 것만큼 고루하고 딱한 부모의 모습은 없다고 여겼다. 내 아이에게 쏟아지는 넘치는 사랑이 부담스러울 때마다 나는 고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결혼 직전에 있었던 그이의 사고를 계기로, 어머님은 그간 처리하지 못했던 시동생의 유품들을 서둘러 정리하셨다. 거주지를 옮기면서 일상의 공간에 남아 있던 고인의 흔적과도 아프게 이별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시댁 곳곳에는 과거의 추억이 부유하고 있다. 내가 결코 공유할 수 없는 시간의 증거들이 내가 미처 알아보지 못하는 형태로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계절이 바뀌어 옷장 정리를 하다가도, 창고 물건을 뒤지다가도, 책장에 보얗게 내려앉은 먼지를 닦다가도 망연히 서 계시곤 하는 어머님.

“이게 여기 있었구나. 다 없앤 줄 알았는데.”

버리지 않은 것인지 버리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무엇 앞에서 나는 자주 먹먹함을 느끼곤 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내가 먼저 어머님께 시동생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간 억눌러 왔을 당신의 슬픔을 감당할 자신도 의지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렴풋이 깨닫는다. 빈자리를 채우고자 했던 나는, 어쩌면 아득한 거리에서 슬픔을 관망하고 있었을 뿐…. 일하는 아들 내외를 위해 두 집 살림을 도맡아 하며 지극정성으로 손주를 돌보신 어머님께 나는 정말이지 당신 딸이었을 텐데. 같은 여성으로서 또 같은 어머니로서 내가 당신께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뿐이다. 문득 내가 당신의 인터뷰어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둘러 봉합된 아픔에 대해, 일상에 묻힌 치유의 행방에 대해 조심스레 묻는 것, 그게 공감의 시작이니까.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슨 질문을 드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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