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는 부모되기
요즘 들어 아이가 더더욱 사람다워지면서 나와 부딪히는 일이 많아졌다. 자아가 형성되고 주관이 뚜렷해지면서 본인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유난히 짜증을 내고 애먼 데 분풀이를 하곤 한다. 신랑 말에 의하면 그냥 나를 닮아 그런 것인데(뭔가 부정할 수 없다), 같이 으르렁거리다가도 이내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고, 나는 또 금세 미안해져서 죄인이 되기 일쑤다. 그런데 아이의 일그러진 작은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마냥 귀엽기도 해서 순간 피식, 웃어 버릴 때가 있다. 얼마 전 같은 상황에서 내가 또 한 번 실소를 터뜨렸는데, 아이는 더 발악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우는데 엄만 왜 웃어. 엄마가 웃으니까 더 눈물 나. 엄마 진짜 나빠.”
학창 시절에 친구 문제로 힘들 때가 있었는데, 그땐 모든 노래가 듣기 싫었다. 걸핏하면 이별해서 힘들다고 징징대는 가사에 ‘도대체 남녀 간 이별이 얼마나 대수기에 함부로 죽는다는 소리를 하는 거야’ 싶어서 당최 공감이 가질 않았다. 그때까지 연애라고는 해 본 경험이 없었으니, 그 슬픔의 깊이를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게다가 그 당시 나에게는, 친구 문제가 지상 최대의 고민이었으므로 다른 아픔에 공감할 여지도 없었다. 아는 언니에게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놨더니, “고민할 것도 많다, 얘. 그래봤자 너만 손해야.”라고 말하는 통에 나는 그만 입을 닫았다. 내 슬픔을 이해받지 못해서 나는 더욱 슬퍼졌다.
“살다 보면 그런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야,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래.”와 같은 식의 위로는 사실 안 하느니만 못하다. 힘들어 죽겠다는 사람에게 하등의 위로조차 되지 않을 뿐더러, 경중을 따져 상대방의 상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냥 입 닫고 들어주는 편이 낫다.
‘공감이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지만, 계몽은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언어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계몽과 훈계의 본질은 폭력이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일삼는 계몽자가 되기를 경계하라는 말이다. 상대방을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조심스럽게 묻는 것, 그것이 공감의 시작이라고 했다.
우는 아이를 보고 웃음을 터뜨려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내가 보기에 별 것 아니라는 이유로 아이의 슬픔을 소홀히 대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세월을 살아 봤다는 이유로 아이의 고민과 아픔을 한순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부모가 되지 않기를…. 외부에서 이식된 답으로 서둘러 아픔을 봉합하게 하거나, 당장의 삶에 충실할 기회를 섣부른 조언으로 박탈하지 않기를…. ‘계몽자’가 아닌 ‘공감자’로서, 현명한 부모가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정말이지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정신 수양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