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에서 한참이나 시선이 머물렀던 구절이다. 작가는 어린 날의 고향 섬, 그리고 군인 시절 구보의 고갯길에서 만났던 마법의 시간이 불현듯 자신을 부른다고 했다. 죽었던 불이 되살아나듯 문득 내 가슴에서도 어떤 동요가 일어났다.
나에게도 이따금 불쑥 떠오르곤 하는 삶의 장면들이 있다. 어쩌면 그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결정적 계기가 아닐는지….
그 집은 꽤 넓은 마당이 있었다. 크고 작은 방들과 볕바른 마루, 계단 층층이 놓여 있던 화분과 나지막한 돌담, 사실 이 모든 풍경은 남아 있는 사진에 의존한 것들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내 기억에 의존해 종종 곱씹게 되는 장면이 하나 있다. 큰 창으로 종일 들어오는 햇살에 늘 온기가 가득한 방이었는데, 마루로 통하는 미닫이문 바로 옆에는 오래되고 커다란 전축이 있었다. 어린 나는 자주 그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낭독 테이프를 틀어놓고 그림책을 뒤적이면서.
글자를 몰랐던 시절이기 때문에 그림 살피랴 이야기 들으랴 난 꽤나 분주했다. 그러나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와 내가 그림을 살피는 속도는 어긋나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난 거실에 있는 엄마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엄마, 지금 어디 읽고 있는 거야?”
행여나 이야기를 놓칠세라 나는 꽤 마음이 달아 있었던 것 같다. 내 성화에 못 이겨 방을 찾은 엄마는 해당 페이지를 펼쳐 주고는 금세 또 나가곤 했는데, 나는 그게 못내 서운했었다.
“그때 엄마는 왜 내 곁에서 책을 직접 읽어주지 않았어?”
이제 와서 과거의 엄마를 탓하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듣자고 꺼낸 질문은 아니었다. 결국 엄마의 늦은 사과를 받아 버렸지만.
“너랑 동생이 아직 어려서 직장 생활을 할 수가 없었어. 동생은 할머니가 보고, 나는 틈틈이 부업에 매달렸지. 그때도 아마 바빴을 거야.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조용해졌다 싶어 들여다보면 넌 잠들어 있었지. 짠하고 미안하고 그랬어.”
아이를 가졌을 때 굳게 마음먹은 것이 하나 있었다.
‘함께 책을 읽으리라, 언제든 어디서든.’
그때 마음먹은 바를 현재로선 그럭저럭 잘 실천하고 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의 대부분을 같이 책을 읽는 데 쏟는다. 그런데 그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아이는 종종 읽기를 중단하고 앞장으로 넘어가 이야기를 다시 살핀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꼬치꼬치 캐묻기도 하고, 관련된 경험을 늘어놓느라 한 권을 보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려서 나는 금세 지치곤 한다. 그래도 나는 꽤나 성실한 답변자에 속해서 아이와 이런저런 책 대화를 나누는 데 익숙하다.
그러다 문득 내 과거의 기억이 일종의 결핍이었음을 깨달았다. 모든 유년이 다 아름답지는 않은 법이고 나에게도 늘 결핍은 존재했다. 아마도 그 순간은 내가 느낀, 적어도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결핍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떠오른 느낌이나 의문들을 전할 새도 없이 그저 일방적인 속도에 따라가야 하는 무력감이나 초조함은 아니었을지.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 아이처럼 책을 보면서도 끊임없이 엄마에게 재잘대고 싶었던 것 같다. 혹은 책을 핑계로 그저 엄마를 내 곁에 두고 싶었는지도….
아이가 즐거워하는 한, 최대한 많은 책을 내가 직접 읽어줄 생각이다. 그리고 글자를 가르치려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글을 읽는 동안 아이는 듣고 보고 생각하고 또 질문할 수 있도록. 무엇보다 아이의 속도에 맞추어 독서의 호흡을 고르고,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실제로 글을 읽느라 활자에 집중하는 나와 달리, 그림 속 인물의 표정이나 옷차림, 배경의 미세한 변화에는 아이가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많은 것을 기억한다. 아이의 무한한 상상력과 섬세한 관찰력이 너무 빨리 글자의 범위에 갇히지 않았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 그 존재의 바닥에 아주 낮게 깔릴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꼭 기억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충만한 느낌 자체만으로도, 한 존재는 더 아름다워질 수 있으니까. 어쩌면 아이를 품에 안고 아이의 체온을 느끼며 책을 매개로 삶을 공유하는 그 시간이, 오히려 나에게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