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인 여성, 그리고 꿈꾸는 삶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다 보면 정말 보석 같은 책을 발견할 때가 있다. 기발한 상상력과 유머, 예리한 통찰력을 갖춘데다 그림마저 아름다운 책을 볼 때면 아이보다 내가 더 설렌다. 최근에 나를 사로잡은 책은 줄리 파슈키스의 『꾸다, 드디어 알을 낳다』라는 책이었다.
암탉 ‘꾸다’는 다른 암탉들과는 달리 알을 낳지 않는다. 다른 암탉들의 수군거림에도 ‘꾸다’는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뿐이다.
“주위를 한 번 돌아봐, 탐스러운 튤립이랑 하늘하늘 벚꽃 말이야!”
그냥 게으른 것이라는 핀잔, 노력이라도 해 보라는 재촉에 결국 ‘꾸다’는 알을 하나 낳는다. 밤하늘의 별, 튤립과 나비, 노란 해와 민들레가 있는 부활절 달걀과도 같은 아름답고 특별한 알을 말이다. 그 후로도 ‘꾸다’는 풀잎에 반짝이는 이슬을 살피고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농장을 어슬렁거린다. 물론 알은 자신이 원할 때만 간간이 낳으면서 말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우선 작가(혹은 옮긴이)의 작명 센스에 탄복했다. 다른 세 암탉의 이름은 각각 ‘하나’, ‘두나’, ‘다나’인데 ‘하나’는 매일 하나씩, ‘두나’는 이틀에 하나씩, ‘다나’는 일주일에 다섯 개씩 알을 낳는다. 그리고 시종일관 대사가 ‘꼬끼오’ 하나뿐인 수탉 한 마리가 등장하는데, 그의 이름은, 바로 ‘안나’다!
‘두나’는 ‘꾸다’를 두고 ‘꿈속에서 사는 애’라며 빈정댄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꾸다’는 ‘꿈을 꾸며 사는 애’였다. ‘주체적인 여성’과 ‘꿈꾸는 삶’, ‘꾸다’가 나에게 던진 화두였다.
나는 스물여덟에 결혼했다. 호기롭게도 자유와 독립에 대한 야심을 품은 채로…. (결혼은 또 다른 구속임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신혼을 적당히 즐긴 뒤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했고, 계획대로 서른에 아이를 낳았다. (이건 정말 감사할 일이다.) 그때의 나는 결혼하지 않는 삶, 결혼은 했으나 출산하지 않는 삶을 상상하지 못했다. 결혼과 임신, 출산과 육아라는 일련의 과정을 인생의 수순 정도로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와서 나의 선택을 후회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때의 나에게 삶의 다양성에 대한 좀 더 유연하고 풍부한 상상력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 현재의 나로서는 장담할 수 없을 뿐이다.
또 한편으론 내 선택이고 내 결정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거대한 생의 흐름에 휩쓸려 떠밀리듯 살아온 것은 아닐는지….
‘꾸다’는 주변의 핀잔이나 재촉 때문에 알을 낳은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그저 자기가 낳고 싶어서, 혹은 낳을 때가 되어서 마침내 알 하나를 낳은 것일 뿐…. 사회적 통념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성‧재생산권을 행사하는 여성, ‘꾸다’가 바로 그런 여성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안정된 직장이 있고 신랑과 아이도 있는 나를, 마치 인생의 중요한 과업을 다 끝낸 사람처럼 여기는 이를 만날 때가 있다. 되잖게도 ‘그래, 내 나이 서른에 미션 클리어!’라고 우쭐댔다가는 으레 이어지는 다음 멘트에 금세 거북해지기 일쑤다.
“둘째는 언제 낳으려고? 엄마한테는 딸이 있어야지.”
그냥 인사치레로 흘려들을 법도 하지만, 나는 괜히 배알이 꼬여서 퉁명스레 답하곤 한다.
“제 인생에 둘째는 없습니다. 아들 하나도 벅차서요.”
그쯤에서 그만두어도 이미 충분한데 굳이 또 덧붙인다.
“아이고, 그래도 둘은 있어야지.”
그럼 나는 그냥 쐐기를 박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낳아야 할 것 같아서 혹은 다들 낳으라고 하니까 낳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게는 제가 온전히 기쁠 수가 없어요.”
나는 이제야 ‘꾸다’와 같은 여성의 삶을, 그 언저리에서나마 좇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낳은 후, 나는 ‘모성애’라는 규범에 내 태도를 비추어 보며 자주 이질감을 느꼈다.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좋은 엄마’의 모습이 내 생활 전반을 옥죄고 있는 것만 같아서, 종종 일탈을 상상했다.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숱한 대화를 나누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엄마’라는 역할을 던져버리고 싶을 때가 많았다.
‘아, 혼자였다면 여기서 이러고 있지는 않을 텐데.’
혼자라면 하고 싶은 일이, 아이와 함께이므로 할 수밖에 없는 일 끝에 늘 소심한 괄호로 붙어 다니는 것은, 내가 아직도 엄마의 삶에 익숙하지 않아서일까, 혹은 엄마의 삶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내 의지의 발로일까.
엄마이자 부인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나로서 살아가는 삶, 그 삶의 감각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약간의 죄책감이나 불안이 있다 할지라도 나 자신의 삶을 고수하려는 노력은 엄마로서, 그리고 부인으로서의 삶도 건강하게 지탱해 주리라 믿는다.
최근 몇 년간 나는 나만의 삶을 가꾸기 위해 꽤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그중 하나가 지역 배움터에서 『주역』을 배운 것이었다. 그때 내가 던져 나온 괘가 ‘진(震)’괘였다. 진괘는 번개와 지진을 의미하는 우레(雷)가 두 개 이어져 있는데, 요동치듯이 심하게 흔들리는 삶을 상징한다. 지금이 내 인생의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것이다. 그 괘로 인해 나는 적잖이 설레었다. 내 인생에서 미지의 영역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는 생각에 초조하던 차였는데, 누군가 나에게 계속해서 꿈을 꾸라고, 끊임없이 흔들리라고 말해 주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가슴 뛰는 설렘을 잊고 반복되는 일상에 매몰되지 않도록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조금 더 민감해지라고 당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꾸다’가 예쁜 색깔을 볼 때마다 신이 나서 꼬꼬댁거렸던 것처럼, 자연의 경이로움을 매 순간 소중히 여겼던 것처럼, 그래서 그토록 많은 아름다움을 몸속에 품고 있었던 것처럼 나도 늘 꿈꾸는 삶을 살고 싶다. 허망하도록 거창한 이상에 취해서가 아니라 오늘보다 나은 정도의 내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이토록 삭막한 시대 꿈 타령이 다소 한갓진 일처럼 보일까 두렵지만, 소소한 희망마저 없다면 또 어찌 버텨낼까 싶은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