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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 Dec 02. 2021

돌고래를 만나다

아이와 제주 한 달


  나에게 여행은 또 하나의 미션이었다.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하는 여행이 좋다고들 하지만, 내 경우엔 그게 쉽지 않았다. ‘내가 언제 또 여길 와 보겠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만 발걸음이 빨라졌다. 가봐야 할 곳 리스트를 만들고 동선의 효율성을 고려하여 촘촘하게 계획을 세웠다. 계획에 따라 분주히 움직이고 나면 즐거움보다 뿌듯함이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한 달이었다. 시간은 충분했다. 게다가 나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떠나는 여행이라 변수가 많을 게 뻔했다. 뭐, 해외도 아니고 제주도니 딱히 걱정할 것도 없잖아.

  계획 없이 한 달을 살아 보자고 결심했지만 막상 제주도에 오니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가 언제 다시 제주의 가을을 이리 길게 즐길 수 있겠어.’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숙소에서 만난 다른 엄마들에게 이곳저곳을 추천받고 공항에서 챙겨온 각종 리플릿을 뒤적였다. 블로그와 인스타 게시물을 검색해서 ‘강추’ 여행지와 맛집 리스트를 메모했다. 아이와 꼭 가볼 만한 제주의 명소가 너무 많아진 게 문제였다. 여긴 제주도니까 다른 데서 못 먹는 것, 못 하는 것을 야무지게 먹고 즐기며 알차게 보내고 싶었다. 한 달도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이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아이가 별안간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숙소에서 친구들과 놀고 싶다고, 오늘은 저를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다.

  ‘아, 오늘 올레길 걷기 딱 좋은 날씬데…. 내일부터 며칠 동안 비 온다고 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의 선포에는 어떤 설득에도 고집을 꺾지 않겠다는 비장한 다짐이 서려 있었다. 억지로 데리고 나가봐야 나만 피곤해질 게 뻔했다.

  차 트렁크에서 큰 돗자리를 꺼내 숙소 마당에 펼쳐 주었다. 아이들은 각자 집에서 블록, 색종이, 스케치북과 색연필 등 놀거리를 하나씩 들고 나오더니 삼삼오오 모여 앉았다. 한참을 그렇게 놀더니 숨바꼭질도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하고 킥보드 경주도 했다. 아이들이 보이는 곳에 앉아 꼬박 한 나절을 보냈다. 

  “오늘 어땠어? 재밌었어?”

  “응, 엄마. 정말 재밌었어. 오늘이 제일 좋았어.”

  아이는 한껏 상기된 얼굴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늘 부지런을 떨며 살아온 나로서는 이렇다 할 성과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게 영 익숙지 않아 좀이 쑤셨는데, 아이가 기억하는 하루는 이토록 달랐다. 그날 생각했다. 나를 위한 여행은 무엇이고 아이를 위한 여행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바라고 여행을 시작했나. 나와 노는 게 제일 재미있다던 아이는 어느새 훌쩍 자라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아이는 자주 숙소 밖을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데도 가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러다 점점 그 시간들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평생을 바쁘게 살아왔는데 게으르게 보내는 한 달만큼 귀하고 값진 시간이 또 있을까 싶기도 했다. 처음엔 타의에서 비롯된 단념에 가까웠지만 어느새 그 시간들을 있는 그대로 즐기게 됐다. 무엇보다 아이가 친구들과 노느라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점심때까지 어울려 놀던 아이들이 하나 둘씩 엄마 따라 놀러 나가고 숙소에 남은 아이가 몇 없던 날이었다. 어슬렁어슬렁 동네 산책이나 하려는데 아이와 아이 친구 하나가 따라 나섰다. 차 타고 다니기만 하던 길을 천천히 걷다 보니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길가에 무더기로 핀 꽃이며 덩굴에 둘러싸인 나무들, 동네 고양이와 색깔 고운 새들까지. 둘이 함께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아이들은 연신 까르륵 거리며 발을 굴러댔다. 드문드문 인가를 지나던 중에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아이들이 귀여워 보였는지 우릴 유심히 살피시더니 먼저 말을 건네셨다. 그런데 아뿔싸, 리얼 제주도 방언은 생각보다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엉거주춤 섰는데 잠깐 기다리라는 듯 한 손짓을 하시더니 집으로 다시 들어가셨다. 이내 돌아 나온 할아버지의 손에는 귤 세 개가 들려 있었다. 우린 그 어느 때보다도 달고 맛난 귤을 까먹으며 승자처럼 귀환했다.

  “엄마, 오늘도 정말 재밌었어. 유치원에서 숲 체험 간 날보다 훨씬 훨씬 더.”

  그날 우리의 산책길은 어느 명소 부럽지 않은 근사한 여행 코스였다.


  사실 아이와의 24시간 밀착 생활은 절대 아름답기만 한 일이 아니었다. 삼 시 세끼 챙기는 일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뿐더러, 무엇보다 아이는 종종 내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산굼부리 억새밭을 찾은 날이었다. 멋진 풍경에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어머, 이건 남겨야 해.’하는 생각이 번뜩 들어 아이를 조르기 시작했다. “우리 같이 사진 하나만 찍자.” 삼각대를 세우고 배경과 구도까지 잡아놨지만 아이는 내 부탁에 묵묵부답이었다. 아이는 억새로 바닥을 비질하는 일에 홀딱 빠져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참을 그러더니 이번에는 돌에 붙은 메마른 이끼를 손톱으로 긁어내기 시작했다. 난 기다리다 못해 결국 아이 옆에 퍼질러 앉았다.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서늘했다. 억새는 황금물결로 일렁이고, 사람들은 저마다 사진 찍느라 바쁘고, 아이는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다.

  끊임없이 셔터를 눌러대는 것도 결국 욕심 아닌가. 나는 왜 이렇게 부지런히 사진을 찍나. 만 장이 넘는 사진을 카메라에 담아놓고 제때 인화하지도 않은 채 묵혀두기만 하면서.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찍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추구하는 삶은 드러내지 않아도 충만한 삶이란 말이야. 그냥 내 눈에 담자, 내 마음에 담자.

  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아이가 나를 불렀다. 엄마, 하는 소리에 돌아봤더니 저만치서 아이가 V자를 하고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노을과 억새와 사랑스런 아이의 조합이라니. 나는 결국 그 모습을 영원히 남기고 싶은 욕심에 또 셔터를 누르고 말았다. 찰칵. 넌 왜 나랑 늘 타이밍이 다른 거니. 그러면서 또 찰칵.

   

  여행이 그런 건지 삶이 그런 건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곳에서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수월봉에서 전기 바이크를 타고 서쪽 해안을 훑으며 달렸던 날, 우린 우연히 야생 돌고래 떼와 만났다. 사실 돌고래 요트 투어를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투어 때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돌고래 떼를 볼 수 있었다. 사실 비싼 값을 주고 요트에서 본 돌고래들은 지나치게 먼 곳에 있었다. 잠시 쉬어가던 해안가에서 우연히 돌고래 떼를 발견한 순간의 그 경이로움과 놀라움이란…. 공짜로 본 것이니 더 좋았을까. 아니, 그보다는 생각지도 못한 만남, 예기치 못한 행운이어서 더 반가웠던 것 같다. 단단히 벼르던 만남이 시시하게 끝나는 일은 종종 있으니까. 딱히 계획이 없다는 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는 일일 수 있음을 우린 그날 배웠다.

  어디든 언제든 무엇을 먹든 오늘과 서로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이 여행의 참맛이라는 걸, 몰랐던 건 아니다. 다만 머리로만 알던 시간을 아이와 밀착하여 한 달간 살아내는 동안 참으로 꿈같은 시절을 보냈다. 제주에서 보낸 한 달은 어쩌면 아이보다 나를 더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또다시 목적의식이 사로잡혀 갈 길이 멀다고 아이를 재촉할지도 모른다. 그런 순간이 올 때면 제주에서 보낸 한 달을 떠올려야겠다. 느릿느릿 빈둥빈둥 살았던 시간동안 우리가 공유한 소소한 재미들을. 목표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갈 때 놓쳤던 것들을 주섬주섬 주워 담는 기쁨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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