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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 Jan 20. 2022

마지막 춤은 시와 함께

시에 들다

 

  다시 한 달이 흘렀다. 어느덧 많이 익숙해진 공간, 백년어서원으로 향하는 길. 발걸음이 가볍다. 이곳엔 내가 해야만 하는 일, 나를 평가하는 시선 따윈 없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품 안의 시집을 꺼내 든다. 또 한 권의 시집을 통과한 반가운 얼굴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시인과 시에 대한 이야기로 공간의 온기를 더한다.

  ‘시에 들다’는 평일 오전에 하는 모임이라, 벗들은 대부분 나보다 연배가 한참 높다. 함께 읽는 시집도, 오래되고 아늑한 공간도 더할 나위 없지만, 시심을 품고 살아가는 벗들의 순정에 나는 자주 감동받는다. 일어나자마자, 혹은 아침을 먹고 난 후 고요한 오전 나절에, 번잡한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어쩌면 잠자리에 누운 채 취침등 아래에서 펼쳐 들었을 시집이 아니겠는가. 하루의 어느 때에 마음을 내어 시집 곁을 서성이는 사람들, 앳된 그들, 동이 트는 당신들이 나는 참 좋다. 시보다 더 시적인 이들이 이곳에 있다.

  혼자서 눈으로만 훑었던 시들이 벗들의 생생한 음성으로 되살아난다. 불현듯 어떤 기억이 복원되기도 하고, 미처 알아채지 못한 내 안의 눈물 같은 것들이 울컥 쏟아지기도 한다. 시의 구절구절이 파도가 되어 덮쳐올 때면 그저 그 너울에 내 몸을 맡길 뿐. 울렁출렁 휩쓸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아무튼 다행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십 수 년간 시를 가르치며 살았다. 내심 안타까웠다. 시 속 구절들로 서로의 삶을 나누며 울고 웃다가도, 결국은 기존 평설의 내용을 끌어와 매끈하게 정돈된 시험 문제를 낼 수밖에 없었으니까. 시를 통째로 소화하기보다 난도질하는 데에 더 익숙한 아이들, 누구를 탓하랴. 나는 종종 상상했다. 시를 제재로 객관식 시험 문제를 내지 않아도 되는 날을. 아이들과 순수하게 시를 즐기게 될 날을.

  그래서 더욱 ‘시에 들다’라는 모임명이 좋았다. 시를 읽지만 말고, 시에 ‘드는’ 삶을 살자는 것인가. 시를 읽는 내가 아니라 나를 품어 줄 시가 주체인 것 같아서 더없이 홀가분했다. 모임 덕에 시를 분석하거나 가르치지 않을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 어쩌면 지금 나는 정지한 씨앗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나는 꽃을 피워낼 수 있을까. 아이들이 시를 사랑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


  좋아 보이는 건 죄다 해보고 싶었던 시절, 순수한 치기에 시를 끄적이던 날들이 있었다. 일상에 치여 잊고 살다가 ‘시에 들다’ 모임을 하며 문득 열망이 되살아났다. 이성복 시인이 말하는 ‘눈송이와 같아서 읽고 나면 독자의 어딘가가 젖어 있는 시’를 나도 한 번 써보고 싶었다. 그런데 뭐라도 끄적여 볼까 마음먹은 순간, 이보다 더 막막할 수가 없다. 시 한 번 써보려고 호흡을 고를 때마다 캄캄한 오르막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어렵사리 쥐어 짜내 봐도 재미없고 느슨하고 허술하다. 내 깜냥을 인정하기로 했다. ‘눈송이 시’가 영원히 남의 것으로만 머문다 해도 아쉬울 건 없다. 어설프게나마 글로 꺼내보려 하지 않았다면, 내 것인지도 몰랐을 기억과 감정들이 먼지 폴폴 날리며 어른거리는 순간을 맛보진 못했을 테니까. 무심결에 감추어 두었던 날들이 깨어나 나를 두 번 살게 한다.


  시를 읽고 쓰며 새삼 깨달았다. 나를 끌고 온 건 다름 아닌 말들이었다. 엄마가 무한히 베풀어준 사랑의 언어들, 오랜 친구의 진심어린 위로, 오롯이 나를 위해 준비된 것만 같던 책 속의 문장들. 쌓인 말들이 내 맘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때론 내가 안다고 믿었던 것을 허물기도 하면서. 또다시 읽고 쓰는 삶이 나를 끌고 갈 것이다.

  백년어 서원의 벽면을 가득 채운 나무 물고기들도 저마다 하나의 글자를 품고 있다. 각자의 사연 속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지닌 채 자유롭게 유영하는 사람들, 나도 그 안에 머물고 싶다. 내 속 어딘가에 소리 없이 활짝 핀 열꽃 같은 말들, 나를 끌고 갈 문장들을 위하여 그래, 마지막 춤은 시와 함께.




<함께 읽은 시, 나를 움직인 문장들>


- 나는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가 울렁출렁하며 마당을 지나 삽작을 나서 뒷산으로 앞개울로 골목으로 하늘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태준,「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中)

   

- 당신의 새파란 앞가슴에 새잎 같은 초승달이 앳된 소년이 서 있는 것을 봅니다./ 나는 동이 트는 당신을 지나갑니다. (문태준,「종이배」中)


-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백무산,「정지의 힘」中)


- 무심결에 꾸미며 산다고/ 감추어두었던 날들이 깨어나/ 먼지를 날리는 내 어깨. (마종기, 「이사」中)

    

- 내 속 어딘가에/ 소리 없이 활짝 핀 열꽃 같은/ 말들, 言路들./ …… 나는 본다./ 나에게로 세상에게로/ 내려앉는 말의 꽃 이파리들./ 내 귀는 듣는다./ 나에게로 세상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말의 발자욱 소리들./ 나를 끌고 가는/ 밑줄 친 문장들. (천양희,「그 말이 나를 살게 하고」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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