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
다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는 일이었구나
- 함민복, 「흔들린다」中
집에 그늘을 너무 크게 드리워 베이게 된 참죽나무 한 그루.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리는 나무을 보며 화자는 생각한다. 그간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다고,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흔들려 덜 흔들렸다고. 나무는 흔들림의 중심에 서 있었던 거라고. 우리가 사는 모습도 매한가지 아닐까. 산다는 건 흔들림 속에서 중심을 잡는 일.
문득 다른 시 하나가 떠올랐다. 정일근의 시 「그 후」. 이 시의 화자는 누군가를 떠나보낸 뒤, 상실의 슬픔에 빠져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저녁마다 체하고 열 손가락 열 발가락 바늘로 따며 검은 피가 다시 붉어지길 기다린다. ‘이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는 것을/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어 잊고 산다/ 어리석어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잠시 심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생을 담은 한 잔의 물도, 생을 닮은 한 그루의 나무도 모두 흔들리고 있다.
흔들린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 죽은 것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쪽저쪽 균형 맞추며 가지 먼저 베이다 마침내 몸통까지 아주 베이고 나면 참죽나무는 더 이상 가지를 뻗지도 이파리를 틔우지도 흔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고통이든 환희든 그 어떤 파장에도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 삶이라면 죽은 것과 무엇이 다를까. 심하게 흔들리더라도 ‘단지 그것뿐’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다독이는 편이 낫겠다.
좋아하는 작가의 강연에 갔다가 책에 사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우리 함께 흔들려요.’ 사인과 함께 작가가 남긴 글귀였다. 오래도록 바라보며 생각했다. 함께 흔들리자고 말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분명한 건, 내가 아끼는 이들에게도 똑같이 말해 주고픈 생각이 들었다는 거였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와는 어딘지 결이 달랐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 감내해야 하는 흔들림과 스스로 지향의 대상이 되는 흔들림의 차이랄까. 흔들리지 않겠다는 완고함이나 흔들림을 극복하자는 비장함보다 그저 함께 흔들리자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다. 산다는 건 함께 흔들리는 일, 흔들림의 감각을 잃지 않는 일. 꿈보다 해몽이어도, 좋다.
참죽나무는 어떻게 됐을까. 가지만 쳐냈나, 아주 베어 버렸나. 이별 후, 먹지 않아도 체하던 검은 피의 사람은? 그 후로 얼마나 더 앓았을까. 가지와 이파리로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생을 담은 한 잔의 물을 엎지 않고 지키는 일도 가까스로 해내야 할 일인가 보다. 어쨌든 살아있음의 증표로 내내 흔들릴 수밖에.